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입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 주었듯이 아이와 함께 빨간 봉숭아물을 들입니다. 아이랑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첫눈이 내릴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사랑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남자가 무슨?’ 핀잔도 듣지만 이런 까닭으로 봉숭아물들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새해를 맞아서 몇 가지 결심을 합니다. 예쁘게 말하기, 다정하게 행동하기, 역지사지(易地思之)하기, 열심히 글쓰기 등등. 지난해에는 부부갈등이 많았습니다. 둘만의 문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외부환경으로 그랬습니다. 마땅치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아내의 힘든 처지가 이해됩니다. 먼저 마음을 여니까 아내도 나의 입장을 공감해줍니다.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고운 얼굴에 피로가 배어납니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얼굴이 수척해져 있습니다. 가만가만 아내의 얼굴을 더듬어 봅니다. 손도 만져봅니다. 세월의 흔적도 있겠지만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하는구나.’ 자책하게 됩니다. 그녀나이 스물셋, 내 나이 스물여덟에 처음 만났습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어쩌면 이 사람이랑 결혼할지도 모르겠구나!’ 예감했습니다.

그 예감이 내게는 행운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녀를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염세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내게 처음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행가 노랫말이 귓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연시(戀詩)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꽃을 사주고 싶어졌습니다.

지하철 명동역을 빠져나올 때의 일입니다. 꽃을 선물하고 싶은데 선뜻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꽃을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지 않을까?’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연한 생각으로 지하철입구를 10여분이나 오락가락했습니다. 설렘과 망설임 끝에 구입한 꽃을 받은 그녀, 별 말이 없었지만 기뻐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연애감정을 되살려야겠습니다.

‘예쁘게 말하기, 다정하게 행동하기, 역지사지하기,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 끝의 봉숭아물 남기기’ 아내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성근·전업주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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