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이라는 오래된 일본 영화가 있다. 한 사무라이가 부인과 함께 산길을 걷고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과 시비가 붙는다. 격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 결국 사무라이가 죽고 만다. 증인은 세 사람. 싸움의 당사자인 행인과 그 걸 보고 있던 부인, 그리고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된 걸인이다. 관가로 끌려가 사건의 전말을 증언하는 세 사람. 그런데 셋은 모두 다른 사실을 증언한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본 전혀 상반된 진실 세 가지. 자,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는 거짓인가.

지난 2년 간 공적 업무를 맡아 일했다. 관이 운영하는 ‘여성’관련 민간자문기구의 업무를 돕는 사무국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과 만나 일하는 경험을 했다. 내 자신은 관에 소속된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주로 민간인 자문위원들과 사업을 했고, 이러한 사업을 여러 여성단체를 상대로 진행했다. 뿐만 아니라 사업비가 관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예산과 관련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의회까지도 연결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중간 매개자 같은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특성으로 해서 한 가지 사안을 가지고도 여러 층위에서 해석되는 상황을 많이 봤다. 같은 사안이라도 도와 의회, 언론, 관련 단체를 거치면서 처음 의도와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거나 확장되어 가는 경우다. 그런가 하면 때로 의도를 읽지 못함으로 해서 반목하고 갈등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내가 절감한 것은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점이다. 서로 상반되는 의견일 때 갈등 당사자는 상대가 나와 다른 의견이라는 것에만 주목하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는 인색하다. 그럴 여유가 없다. 발언 내용보다 그 의도와 배경을 알고자 하는 데 소통의 열쇠가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각자 귀를 막고 자기 말만 소리치는 아우성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이런 게 내가 일했던 여성계만의 일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오르내리는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통능력 결핍’이라는.

영화 <라쇼몽>은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판정하지 않는다. 각자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세 가지의 관점에 똑 같은 비중의 진리 값을 준다. 한 가지 사실에도 여러 시선이 있을 수 있고, 이 역시 각자의 관점으로 해석된 각각의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러 관점이 다양하게 공존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왜 그렇게 보였을까, 공감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따져보는 것, 즉 소통을 위한 노력일 거다.

입은 하나이고, 귀는 두 개인 까닭을 깊이 새겨볼 때다. 이 말을 하는 나 역시도.

김유경(전 제주특별자치도여성특별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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