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60년 지상유물전] <3>다시 시작하는 4·3 역사 진실 찾기

   
 
   
 

4·3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수십년간 진행됐지만 4·3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역사다. 진상규명 노력으로 4·3특별법이 제·개정됐지만 국가차원의 추가 진상조사, 평화공원 설립에 따른 정부지원 확대, 생계곤란 유족 지원 등 완전한 해결을 위한 과제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완성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최근에는 4·3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동과 망언도 잇따르면서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또다시 큰 상처를 안기고 있다. 4·3 사료관에 조성될 전시공간들은 역사를 거스르는 극우·보수단체들에게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역사교육 부재로 왜곡·망언 잇따라

제주사회의 4·3 진상규명 노력은 정부와 국회를 설득시키면서 4·3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 냈다.

진상규명 노력은 짧게는 지난 1987년 민주화운동, 길게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 4월19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 이후 4·3의 진실을 찾으려는 기억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4·3의 진실을 증언하는 기억들은 보고서로 작성, 국회에 제출됐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지하세계에 묻혔다.

군사독재정권도 4·3의 기억을 묻어두었을 뿐 지우지는 못했다. 제주시 북촌리의 집단학살 사건이 억눌렸던 4·3의 진상규명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제주출신 소설가 현기영씨가 1978년에 발표한 「순이삼촌」으로 북촌리 주민 학살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진실을 찾기 위한 논의가 다시 진행됐다.

또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사회운동단체·학계·문화예술·언론계 등의 진상규명운동으로 1999년 12월말 ‘제주4·3특별법’이 제정, 이듬해인 2000년 1월12일 공포되면서 평화의 시대를 여는 중요한 발판이 마련됐다.

참여정부를 맞이하면서 비극의 4·3역사는 화해의 ‘물’과 상생의 ‘거름’으로 평화를 피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잘못된 국가 공권력을 사과하고, 4·3 위령탑 앞에서 사죄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한나라당이 집권하면서 4·3 진실찾기 노력이 위기를 맞고 있다. 한나라당이 4·3특별법 폐지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재향군인회 등 18개 극우·보수단체들이 희생자 1만3564명을 폭도로 매도하는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다.

4·3 역사에 대한 극우·보수단체들의 왜곡·망언은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다. 군부독재 정부가 공산주의 폭동으로 왜곡시킨 논리만을 학교에서 교육, 극우·보수단체들이 4·3의 진실을 다시 지하세계에 묻어두려 하고 있다.

△4·3 진실을 확인하는 첫 여정

4·3 평화기념관의 방문은 역사의 터널을 되걸어 당시의 진실을 확인하는 지난한 여정이다. 진실 확인은 희생자나 유족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역사왜곡·망언을 내뱉는 극우·보수단체나 정당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2006년 4월5일 4·3 평화공원을 방문, 희생자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내용을 방명록에 기록했다.

그 첫 발걸음으로 방문자들은 제1관 ‘프롤로그’와 제2관 ‘해방과 좌절’의 전시공간을 만나게 된다.

동굴 분위기 속에서 바람소리, 물 소리를 듣는 프롤로그 공간은 현재에서 1945년의 제주로 돌아간다. 일상의 시간에서 역사의 터널을 타고 과거의 시간으로 내려가는 여정이다.

화산섬의 지질 특성으로 제주섬 곳곳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천연동굴은 당시 도민들의 피신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기억의 저장소이다. 동굴 분위기로 연출된 30여m의 프롤로그 진입로는 역사속의 시간으로 찾아가는 전이공간 의미가 함축돼 있다.

프롤로그 공간은 역사의 전환 및 1945년으로 돌아가는 역사의 터널이지만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못했기에 ‘백비’(白碑)가 세워진다. 백비는 아직도 바르게 규명되지 않은 4·3 역사를 의미하기에, 한 글자도 쓰여지지 않는다. 프롤로그 공간은 4·3이 정명되지 못한 역사임을 확인하는 시작점이다.

△해방과 좌절의 제주사회

역사의 터널을 지나면 1945년 일본의 압제에서 국권을 되찾은 해방과 1947년 3·1사건 등의 좌절을 둘러싼 큰 이야기와 민초들의 개인별로 겪은 작은 이야기로 구성된다.

해방과 좌절의 전시공간은 2차 세계대전과 일본이 제주를 최후의 보루로 삼기 위해 7만명의 군병력을 주둔시키고, 섬 곳곳을 요새화했던 ‘결7호작전’과 이에 따른 제주도민의 상처·곤욕 등이 연출된다.

또 일본군이 물러간 자리에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이 실시되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6만명의 제주사람들이 귀향,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해방 직후의 제주 모습이 제2관에서 숨을 쉰다.

제주사회의 당시 자치활동 역사도 꾸밈 없이 펼쳐진다.

항일운동가들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제주의 자치활동이 펼쳐지고, 이들은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 통일민족국가를 세우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1947년 3·1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본격적으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고, 서북청년회·경찰력 등 외부세력이 유입되면서 도민들과 충돌하는 등 제주사회가 커다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진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1948년초 2·7 사건에 뒤이은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국면에 접어든다. 3·1절 발포사건은 제주사회가 4·3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 우리나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낳게 한다.

◆특별취재반=박훈석 사회경제팀장·김대생 인터넷팀 차장·박미라 자치팀 기자·문정임 교육문화체육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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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710-6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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