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는 극도의 혼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정체를 보인 바 있다. 모든 나라가 묵은 천년을 씻고 새로운 천년으로 그 방향성을 찾고 있을 때 우리는 대립과 반목 그리고 갈등이 막연한 구태의연한 퇴영의 나락에 머무른 것이다.
IMF를 거치는 2년여 동안 그러한 현상은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켜 나라꼴이 제대로인지에 대한 자괴의 소리가 높아갔다. 있는자들은 고금리가 만들어 준 돈방석에 앉아 흥청망청 물쓰듯 소비하면서 '이대로'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기꺼워했다. 그러나 실업으로 매몰린 노숙자들의 긴 행렬, 1만여명에 이르는 결식 아동들의 피폐해진 눈망울을 외면하는 비인도적인 거침없는 만행을 그들은 이해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더욱 분노하고 그리고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 현상이다. 사실 만민이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 지도층이라는 개념은 옳지 않다. 그러나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사회의 여론을 환기하고 주도하는 세력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은 공인인 탓에 절제된 언어와 몸짓, 투명한 생활관을 유지하려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진리가 이러함에도 우리의 사회지도층은 뒷돈 빼내기에 급급하거나 끊임없는 폭로로 정쟁을 일삼는 소인배적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낸 바 있다.
도대체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새로운 천년을 맞은 아침에 진실로 묻고 싶은 물음표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모든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우리나나는 존재한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백번 천번 옳은 말이다. 이 나라는 우리 모두가 환란으로부터 지켜냈고, 앞으로도 더욱 잘 가꾸어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나라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 모두는 위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 같다. 화해와 협력이 살아 숨쉬고 포용과 도량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공동체의 건설을 위해서, 우선 우리는 내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호양의 미덕을 가질 일이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내 이웃의 자식 또한 귀할 것이다. 내 자존심이 중하면 내 이웃의 자존심 또한 존중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내가 사는 지역이 존중받으려면 내 이웃이 사는 지역을 먼저 좋아할 일이고 내 종교가 그렇다면 내 이웃의 종교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른바 화해와 상생의 원리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너는 죽어야하는 논리는 저 아프리카의 정글에서나 통용되는 야수의 언어일 뿐이다. 문명의 이기로움이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이 나라에서는 모든 지역, 계층, 종교가 서로 화해하고 서로 함께 누리는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21세기를 열어가는 우리 모두의 지상명제이다. <김승제·제주도지방개발공사 사장><<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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