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가던 젊은 농부가 무덤가에서 노인을 만났다. 농부는 노인의 청에 따라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한잔 술에 이런 이야기가, 두잔 술에 저런 이야기, 그리고 세잔 술에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석잔 술에 자리를 털고 마을로 내려와 보니, 웬걸 부모님도 안 계시고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너무나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던 젊은 농부, 알고 보니 300년이 흘러있더라는 것이다.

 잠깐 동안의 피신이, 1주일만 피해있으라던 당부가, 잠시 나갔던 온다던 그 걸음이 젊은 농부처럼이나 50년이 되어 돌아왔다. 그 어느 세계사에도 없는 재회의 장면은 감동이 되어 세계의 안방을 울렸다. 300년을 잃어버린 젊은 농부의 슬픔만큼이나, 생사를 모르던 50년 침묵 속에 살아 돌아오니 그 비애가 사뭇 깊고 원망스럽기만 한 것이며, 그래서 그 감동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민족은 이념보다 강하다고 했다. 그런 이념이 민족의 비원을 억누르며 이 오랜 세월을 가로막아 왔으니, 때론 이념은 민족보다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념이 감동을 가로막아왔다면, 그건 썩어빠진 관념일 따름이다.

 다양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숱한 화해의 현장은 항상 우리를 감동시켜왔다. 유태인 집단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 무릎을 꿇은 가해국 독일 수상의 눈물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자신들을 학대하던 백인들을 향해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보낸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를 보며 우리는 또한 감동으로 설레었다. 그리고 반공이데올로기의 심장을 관통한 햇볕정책 역시 세계인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감동을 싹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벽을 넘어서야 했을까? 신나치주의자들의 온갖 반격과 남아공의 복수심에 불타는 흑인 피해자들, 反북한주의를 비빌 언덕으로 삼는 소수 정치인과 언론인의 정치공세. 감동을 폄하하고, 감동이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무리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감동을 방해하는 그들의 준동을 보기 좋게 비켜갔다. 그래서 역사의 강물은 도도하게 흐른다고 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비극의 주인공은 그 어떤 권력이나 비극의 곁에 서있는 제3자가 아닌, 바로 당사자일 뿐이었다. 따라서 비극의 해법은 당사자의 바램에 따라야 한다. 이들의 비원을 무시한 움직임은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오든, 어떤 논리에서 나오든 무책임하고 잔인할 따름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에 반하는 모든 것에 분노한다. 상봉장소 이외의 곳에서는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약정 때문에, 북의 아들이 거동할 수 없는 서울의 노모를 지척에 두고도 뵐 수 없었던 비극에 분노한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가 얘기했듯이, '제도는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에 동감하기 때문에 더욱이나 그렇다.

 80년대 이후, 우리는 불구대천지원수로만 알았던 사회주의국가와도 화해했다. 그리고 남북의 화해도 시작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제주의 4·3 뿐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용서받지 못할 자도, 용서하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군이었던 형과 인민군이었던 동생이 과거를 묻어버리고 손을 잡은 오늘이다. 아무도 이들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감동이었다.

 아직은 4·3의 화해를 위해 그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믿건대, 당사자들은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목놓아 울고싶어 할 것이다. 만일 당사자들이 화해의 감동을 원할 적에 이를 방해한다면, 그것이 누구이든 어떤 논리이든 우리는 분노할 것이다.<이규배·탐라대 교수·일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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