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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운동진실을 찾기 위한 질곡의 공간[4.3 60년, 지상유물전] <6> 다시 시작하는 4·3-5관 후유증과
박훈석 기자
입력 2008-03-04 (화) 16:49:47 | 승인 2008-03-04 (화) 16:49:47
   
 
  제59주기 4.3희생자 위령제.  
 
지금은 불교가 대중화 됐지만 1400여년전에 누군가는 부처가 있다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반대로 누군가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고서야 목숨을 연장한 기록들이 동서고금의 역사속에서 전해지고 있다. 제주4·3 진상규명 역사도 마찬가지다. 제주도민들은 4·3이 끝난후, 반세기의 혹독한 세월이 또 지나서야 진실의 입을 열 수가 있었다. 5관은 권력 앞에 굴종을 강요하는 반공법·국가보안법·연좌제 등에 대항, 4·3의 진실을 찾기 위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를 딛고 일어섰던 제주사회의 이야기가 꾸밈 없이 펼쳐진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의 긴 세월

1954년 9월21일 한라산금족령이 해제되면서 제주4·3은 7년7개월의 오랜 시간 끝에 막을 내렸다. 지역주민들의 마을성곽 보초임무도 없어졌고, 소개됐던 중산간 마을의 복구 및 이주·정착사업도 전개됐다.

그러나 4·3은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제주도민들은 막대한 인명·물적 피해 외에도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을 앓았다. 4·3 직후 한라산 통행이 가능한 평화가 찾아들었지만 제주도민에게 숨을 죽이도록 강요하는 세월은 계속 이어졌다. 때문에 한라산 평화는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기억들을 그대로 묻어 둔 채 겉으로만 포장한 ‘거짓’ 평화였다. 거짓 평화속에서 제주사회는 곳곳에 새긴 상처가 심한 고름으로 썩어들어가도 진실을 꺼내지 못했다. 제주도민에게 4·3은 밖으로 꺼내는 것이 금기시된 단어였다.

4·3의 아픔은 당시의 무고한 희생에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법적 근거가 없는 ‘연좌제’ 사슬에 묶여 공공기관의 감시를 받았고, 장래가 막히는 등 피해가 대물림되면서 아픔이 계속됐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 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란 소리를 들었고, 신원조회 피해·출입국 제한 피해 등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누리지 못한 채 ‘레드 콤플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섯알오름 학살터.  
 



△질곡의 진상규명 역사

지금은 누구나 4·3의 진실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2000년 1월11일 ‘4·3특별법’ 제정 이전까지의 과정은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4·3을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 반역자로 낙인을 찍는 오욕의 역사가 점철됐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과 군부독재의 국가 공권력에 억눌렸던 4·3의 치명적인 상황은 진실을 개척하는 자극제가 됐다. 마을공동체를 소중히 여겼던 제주사람들이었기에 비극의 역사로 파괴된 도민공동체 복원운동은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의 과제로 작용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0여년간 굳게 입을 다물었던 유족들의 경험이 봇물처럼 터졌다. 그러나 4·19혁명 직후 시작된 제주대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국회진상조사위원회 활동, 국회 양민학살신고서 등 다양한 진상규명작업은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고, 1980년대 중반까지 기나긴 암흑의 세월속에 다시 묻혀졌다.

군사쿠데타 발생 이튿날인 5월17일 제주대동지회 회원인 이문교·박경규씨가 옥고를 치렀고, 진상규명을 호소했던 모슬포 유족들도 연행된후 고초를 겪었다. 경찰은 모슬포 유족들이 건립한 ‘백조일손위령비’ 마저 부순후 땅속에 파묻어 버렸고, 4·3은 이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등에 의해 20여년간 역사속으로 묻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4·3의 진실규명운동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권력에 기댄 누군가는 4·3의 진실을 덮기 위해 소신을 굽혔지만, 진실에 터를 잡은 누군가는 혹독한 고초를 겪으면서 진상규명운동에 나섰다.

1978년 제주출신 소설가 현기영씨가 발표한 「순이삼촌」은 4·3의 진상과 상처의 일부를 세상에 이야기하면서 4·3을 다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물결속에서 대학생·재야단체·학술·언론·문화계·제주도의회 등을 중심으로 진상규명운동이 다시 전개됐다.

1989년에는 도내 12개 단체로 구성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를 축으로 한 진상규명과 기념사업이 펼쳐졌고, 1990년 6월에는 유족회가 태동, 이듬해에 위령제를 가 개최했다.

특히 1998년 59주년을 맞아 본격적으로 추진된 특별법 제정운동의 결과 1999년 12월 정기국회에서 ‘4·3특별법’이 통과됐다. 이어 새로운 21세기가 시작된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유족·시민단체 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특별법 제정에 서명했다. 또 특별법에 따라 정부 진상조사와 희생자 신고가 이뤄지면서 2003년 10월15일 4·3진상보고서가 확정되고, 이어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진상보고서에 근거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진실을 새기는 소원의 벽

‘후유증’과 ‘진상규명 역사’가 맞물리며 4·3 역사를 전개하는 5관은 △복구와 정착 △후유증 △진상규명운동으로 큰 이야기를 엮어간다.

5관에서는 또 앞서의 1~4관에서 방문자들이 새롭게 인식한 4·3의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는 공간이다. 방문자들은 손바닥만한 작은 종이에 4·3 역사와 미래의 메시지를 기록한후 이를 격자형태로 만들어진 ‘소원의 벽’에 붙일 수 있다. 잘못된 공권력에 억눌려 수십년간 애써 외면하고, 배척하던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더욱 밝고 긍정적인 미래를 개척하는 힘이 이곳에서 축적된다. 5관은 4·3 후유증 역사와 진상규명 역사가 서로 맞물리면서 상생의 섬으로 거듭나는 공간이다.

◆특별취재반=박훈석 사회경제팀장·김대생 인터넷팀 차장·박미라 자치팀 기자·문정임 교육문화체육팀 기자

제주4·3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 할 도민·유족의 유물기증을 바랍니다.
☞접수처=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710-6947)


박훈석 기자  hspark@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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