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이 다가오는 시기이면 나는 15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여든을 넘기고도 몇 해를 더 사셨으니 장수하신 편이었다. 우리 집은 4·3당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직계가족은 물론이고 내가 아는 친척 범위 안에서도 일본으로 밀항한 분은 몇 계시지만 4·3 당시 군경토벌대는 물론 산사람들에 의해 돌아가셨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왜 자꾸 4·3과 할아버지가 연관이 되어 생각이 나는 걸까.
  어느 시기에는 한집에 4대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므로 우리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것 같고 그 가운데 할아버지가 계셨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할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부지런하셨고 성격이 곧으셨던 것 같다. 융통성이 거의 없으셔서 어린 우리들과 어울리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지면 우리는 열일을 제쳐두고 우선적으로 그 명령에 따르도록 길들여졌다. 한번은 어머니가 수도세를 제때 내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평상시 당신의 며느리에게만큼은 너그러웠던 분이신데 어머니가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야단을 치시는 것이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였던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공권력· 국가권력이라는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갖고 계시다는 거였다. 국민의 4대 의무 준수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과금 한번 안내도 큰일날것 같이 성을 내고 이장님이 시키는 마을청소 명령에도 식솔들을 앞세워 제일먼저 나가야 하셨다. 할아버지의 이런 자세는 다른 분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어린 우리들에게는 수난의 원천이었다. 숨 막히고 재미없는 집안분위기에서 어린시기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 당신의 손녀 한명이 시위하다 잡혀 구치소에 갇혔다가 나왔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집에 내려온 손녀를 앞에 두고 대성통곡하시는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의 눈에는 참 기이한 장면이었다. 일흔이 넘은 노인네가,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것 같던 할아버지가 스무 살 손녀 앞에서 울던 그 모습은 당시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이제 우리집안은 큰일 났져" 하며 울부짖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공포와 걱정으로 얼룩진 참담한 모습이었다.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곳에 있는 우리 집은 4·3때 폭도들에게 총을 쏘는 소리가 집안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종종 들려주신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성산일출봉에 하영 모여 있고 들려오는 총소리가 요란했다"고. 살벌한 4·3의 광풍에서도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살아나신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부모님과 여섯 명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할아버지가 해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오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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