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60년 지상유물전>-다시 시작하는 4·3-(9)역사의 동굴

   
 
  ▲ 4.3기념관 백비  
 
화산폭발로 제주섬 곳곳에는 천연동굴이 생성됐다. 제주사람들에게 동굴은 외부의 탄압과 학정을 견디지 못해 몸을 일시로 피하거나 주거지를 옮기는 피신장소로도 이용됐다.
제주4·3평화기념관내 상설전시관은 동굴로 시작된다. 이 동굴은 방문객들을 1945년 당시의 과거 시점으로 이끄는 공간이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상황속에서 제주4·3이 발생한 배경을 진솔하게 이야기함은 물론 60년이 흐른 제주4·3 역사가 여전히 미완의 역사임을 일깨운다.

△진실을 확인하는 첫 여정지

제주4·3평화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은 4·3 역사의 터널을 되걸어 진실을 확인하는 지난한 여정이다.

첫 여정지에 위치한 '역사의 동굴'은 제주4·3평화기념관의 프롤로그 공간이다. 역사의 동굴에서 방문객들은 현재에서 1945년 해방을 맞은 60여년전의 제주로 향한다. 동굴 속을 걷는 역사의 터널을 타고 과거의 시간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제주의 천연동굴은 그 자체로 제주인들이 외부탄압을 피한 피신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기억의 저장소이다.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는 '역사의 동굴' 진입로에는 깨어진 항아리 등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억눌린 상황속에서도 한줄기의 빛이 스며들면서 희망이 살아 있음을 전한다.

30여m 길이로 만들어진 '역사의 동굴'은 방문객들이 제주4·3평화기념관의 상설전시공간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이면서, 60년전 제주역사 속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이공간이다.

   
 
  ▲ 4.3 기념관 동굴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역사의 동굴을 빠져 나오면 하얀 색깔의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일반적으로는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지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옆으로 눕혀져 있다. 60년전 발생한 제주4·3역사가 현재까지도 성격이 완전히 규명되지 못한 채, 정명(正名)되지 못한 미완성의 역사로 남아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못했기에 하얀 색깔의 비석인 '백비'(白碑)를 눕혀 놓았다. 백비는 어떠한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그래서 3m 크기의 백비에는 한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백비는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울 수 있으리라'면서 현 세대가 다시 시작해야 할 완전한 진상규명의 책무를 일깨우고 있다.
 
△제주를 둘러싼 해방전·후 역사

백비를 지나면 1945년 해방 전·후의 현대사가 펼쳐진다. 사진, 영상, 쇼케이스로 연출된 패널은 일본군이 제주섬 전체를 군사요새화하고, 연합군에 패배한 1945년 당시 국내·외 및 제주사회의 모습으로 시간이동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이 곳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기점으로 펼쳐지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속에서 제주 4·3이 발생한 시대적 상황을 탐색하는 공간이다. 

1910년 우리나라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착취와 수탈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이뤄졌다.

제주사회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초 발생한 제주해녀항일항쟁만 해도 일제의 착취·수탈에 분연히 맞선 제주민중의 역사이다. 제주사회는 자치공동체를 파괴하는 외부의 침략에 저항한 항쟁의 역사를 안고 있다.

   
 
  ▲ 4.3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들  
 
△일본군 요새로 전락한 제주섬

일제의 착취·수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중국 본토 공격을 위해 제주섬을 군사요새화했다. 천연동굴을 군사요새화한데 이어 제주도민을 강제 노역에 동원,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 66만㎡ 규모의 알뜨르비행장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또 해안가 곳곳에 어뢰정을 숨겨놓기 위해 파놓은 특공기지, 어승생악의 토치카, 가마오름 등 한라산 중허리 산악지대에는 땅속으로 거대한 진지가 구축됐다. 일제의 진지구축으로 제주사람들은 연일 강제노역과 공출로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일제의 야욕은 제주섬을 초토화시키는 위기까지 초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 본토가 미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자 제주도 전체를 군사요새화하는 작전을 감행한다.

일제는 1945년 3월에는 패전을 앞둔 시점에서 제주도를 본토 방어의 결전지로 이용하려는 '결(決) 7호 작전'을 결정했다. 이를 위해 제주도의 모든 군을 통솔하는 제58군사령부를 독자적으로 창설하고, 만주 관동군 예하부대였던 제111·제121사단과 서울에 주둔한 96사단 등 일본군 7만명을 곳곳에 배치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22만명이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일제의 '결7호작전'은 제주섬을 제2차세계대전의 초토화 속으로 몰아넣는 화약고 였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도 '결7호 작전'을 입증하는 '유격전 준비한 일본군 배치도'가 전시됐다.

1945년 8월 작성한 이 병력배치도는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 한라산 어승생을 본부로 중산간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최후 결전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작전은 1945년 8월15일 일제의 패망으로 물거품이 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달만 더 늦게 끝났더라도 제주섬은 불바다로 변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연합군이 1945년 9월 제주섬 상륙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제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으로 제주도민을 짓눌렀던 외부세력의 수탈·착취도 '일시 정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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