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열망 무산 '빨갱이 섬' 전락
미군정 3·1 발포사건 4·3 도화선

   
 
  ▲ 4.3 사료관 내부.  
 
<4·3 60주년 지상유물전>-다시 시작하는 제주4·3 (10) 흔들리는 섬

 '역사의 동굴'을 거쳐 만나는 제주4·3평화기념관내  '흔들리는 섬' 상설전시관은 60년전 우리나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이 발생한 이유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흔들리는 섬' 전시관내 패널은 지난 1945년 8월15일 한국 및 제주사회에 찾아온 해방의 기쁨과 함께 '38선'으로 한반도를 둘로 나눈 분단의 좌절을 이야기한다. 제주4·3의 전사(前史)를 기록한 '흔들리는 섬'은 해방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제주사회가 겪은  '해방-자치-미군정-3·1 발포사건-탄압'의 역사적 상황이 이곳에서 전개된다.

# 해방의 감격 맞은 제주사회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주에서도 일본군 항복조인식이 진행됐다. 1945년 9월28일 제주농업학교에서 거행된 항복조인식에는 미군 그린 대령과 월든 대령이 참석, '결7호 작전' 임무를 맡았던 일본군 제58군사령관 토야마 중장과 센다 제주도사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미군은 이어 일본군 무기와 폭발물을 바다에 버리고, 비행기·탱크 등을 폭파하는 등 무장해제했다.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은 귀향 행렬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전쟁터 등에 강제로 끌려간 제주도 청년들이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귀향 행렬속에는 일본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제주사회는 해방 이후 귀환한 6만여명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등 들썩거렸다.

전시공간에도 일장기에 태극기를 그리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이처럼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밝지 않은 빛 속에서 서툰 솜씨로 태극기를 그리는 가족의 감격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4.3 사료관 내부.  
 
# 자치열망으로 뜨거운 제주

해방후 '우리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 결성됐다. 1945년 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곳이 구성된 건준 조직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제주의 건준 지부도 1945년 9월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성됐다. 제주에 주둔한 제59군정중대의 미군정도 초기에는 건준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도민들이 직접 구성한 읍·면·리 단위까지의 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했다.

타지역과 달리 항일투쟁 활동가들이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친일파만 배제할 뿐 좌·우익 모두가 참여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처럼 세력이 강했지만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고, 특히 중앙인민위원회와도 거리를 두며 독자성을 유지하는 등 미군정 중대와도 큰 갈등 없이 협력하면서 존속기간이 전국에서 가장 길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처럼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이끌고, 치안활동·농사방법 교육·학습회·야학운영·학교설립운동 등을 전개했다. 학교설립운동으로 해방후 1947년까지 설립된 학교는 초등 44곳, 중등 10곳에 이르렀다.

전시공간내 교실 모습은 귀향 청년들을 중심으로 '배워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 야학과 학교설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주민자치의 힘으로 초·중등학교를 세웠던 활동은 오늘날 정부의 '소규모학교 통폐합' 정책에 반대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 미군정 실정 민심 자극

1945년 11월9일 제주도에 들어온 미군 제59군군정중대도 초기와는 다르게 군정업무에 친일 경찰·관리를 다시 등용, 민심을 자극시켰다. 이런 가운데 1946년 8월1일 제주도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 남한 아홉번째의 '도'(道)로 승격, 도제를 실시하면서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됐고, 경찰 조직도 전남경찰청 산하의 경찰서에서 제주감찰청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미군정 시기의 제주사회 생활상은 일제 강점기때와 다름 없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귀향자들의 심각한 실직난, 대일교역 불법화, 생필품 부족까지 겹치면서 곤궁함을 면치 못했다. 여기다 콜레라 전염병의 만연, 보리농사 흉년까지 겹치자 미군정은 미곡의 자유판매를 시행하는 '미곡 자유시장'정책을 시행했지만 몇몇 지주와 관리들의 매점매석행위로 쌀값 폭등을 초래하자 '미곡수집령'을 공포, 일제가 행하던 쌀 공출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우왕좌왕, 농민들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1947년초 발생한  '모리배 사건'은 전국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대일교역 금지로 밀무역이 성행하는 가운데 일본내 재산, 생필품을 제주로 반입하는 과정에서 일부 군정관리, 경찰고위간부까지 모리배들과 손을 잡고 잇속을 채우다가 적발, 제주감찰청장 파면까지 몰고 왔다.
전시공간에는 미군정의 실정으로 고통 받는 제주민중들의 모습을 멍석에 깔려 있는 '죽음의 기둥'으로 표현하고 있다.

   
 
  ▲ 전시공간에는 당시 미군정과 경찰의 검거선풍을 '수감자로 넘쳐나는 유치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 4·3으로 가는 도화선 '3·1발포사건'

1947년 3월1일은 제주 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은 날이었다. 3·1 기념식에 앞선 1947년 2월23일에는 제주도에서도 뒤늦게 좌파세력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됐다.  민전 주도로 열린 제28주년 3·1절 기념식후의 시위에서 군정경찰의 발포는 큰 소요가 없던 제주사회를 들끓게 했다.

전시공간도 당시 기념대회 발포사건의 전개 과정을 3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다루면서 실상을 전하고 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제주민심이 악화됐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 보다 시위 주동자 검거에만 주력했다. 이에따라 좌익진영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했고, 3월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66개 단체의 4만1211명이 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일부 경찰도 참여하는 '관공리 총파업'이 진행됐다.

하지만 군정당국은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파 청년단체를 제주에 내려보내 물리력으로 검거공세를 전개함으로써 미국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이 전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특히 중앙 미군정청이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가운데 당시 경무부장인 조병옥은 총파업이 진정세에 접어든 시기를 이용, 경찰 발포를 정당방위로 항변하고 3·1사건이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등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장했다.

전시공간에는 당시 미군정과 경찰의 검거선풍을 '수감자로 넘쳐나는 유치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감자들이 유치장이 비좁아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수감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보고서도 "약 3.3평의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7년 3·1 발포사건후 1948년 4·3 발생 직전까지 1년간 검속된 숫자는 무려 2500명에 달했다. 결국 3·1절 발포사건은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인 '4·3'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박훈석 기자 hspark@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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