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제주도위원회 4월3일 새벽 2시 무장봉기
도민 5·10 단독선거 반대…미군정 강경진압 선회

4·3 60주년 지상 유물전=다시 시작하는 4·3 <11>'바람타는 섬'

제주4·3평화기념관내 2관 '흔들리는 섬'이 경찰 등의 1947년 3·1 발포사건, 검거선풍, 고문치사 등 4·3의 발생원인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3관 '바람타는 섬'은 4·3의 발생 상황을 이야기하는 장소이다. '바람타는 섬'은 제주사람들이 1948년 4월3일부터 10월까지 7개월여간 겪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외부세력에 맞선 제주역사

제주역사는 외부의 바람(세력)에 대한 항쟁의 연속이었다. 탐라 독립국이 고려왕조에 복속된후 제주섬은 중앙정부로부터 끊임없는 간섭과 예속에 시달려왔다.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강한 생활 공동체를 이뤘던 제주도민들은 외부의 수탈과 탄압에 저항했다. 

고려가 탐라에 수령을 파견한지 15년만인 1168년 양수가 당시의 가중한 진상품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맞서 최초의 봉기를 일으켰고, 조선왕조 말기에는 1862년 '강제검의 난', 1898년 '방성칠의 난', 1901년 '제주항쟁'(이재수의 난) 등이 이어졌다.

제주민들의 저항정신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1919년 조천 만세운동에서 부터 1931년부터 1932년 초기까지 구좌면·성산면 등 6개 마을 해녀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에 항거한 해녀항일투쟁을 벌였다.

전시공간에는 양수의 봉기, 삼별초의 난, 제주항쟁, 법정사 항일운동, 해녀항일투쟁이 동판화 부조물로 되살아나며 제주민의 저항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경찰 탄압에 저항……단선·단정 반대"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제주4·3에 대해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전시공간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350여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를 공격하는 한편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단체 등 우익요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한 결과 이날 하루동안 경찰 10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27명, 무장대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무장대는 당시 경찰 등에게는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도민에게는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임을 알리는 구호를 통해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밝혔다.

△미군정, 강경진압으로 선회

미군정은 4·3 초기의 무장대 공격을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 증파로 사태를 막으려 했다. 미군정은 이어 4월17일 관망하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 진압명령을 내렸지만 9연대는 경찰·서청 등 극우세력의 횡포로 야기된 것으로 판단, '선 선무 후 토벌'을 원칙으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4월28일 당시 김익렬 9연대장과 무당대 군사총책 김달삼이 만나 '72시간안의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뤄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평화협상을 체결했다.

미군정은 4·3 초기의 무장대 공격을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 증파로 사태를 막으려 했다. 미군정은 이어 4월17일 관망하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 진압명령을 내렸지만 9연대는 경찰·서청 등 극우세력의 횡포로 야기된 것으로 판단, '선 선무 후 토벌'을 원칙으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4월28일 당시 김익렬 9연대장과 무당대 군사총책 김달삼이 만나 '72시간안의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뤄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평화협상을 체결했다.

평화협상에 따라 몇몇 사람들이 무장을 해제, 마을로 내려왔지만 이 협상을 깨트리기 위해 3일후인 5월1일 무장대를 가장한 우익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제주도 메이데이'가 발생했다.

결국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후 5월3일 미군정은 5·10 선거를 치르려는 조급함으로  "무장대를 총공격하라"고 경비대에 무력 진압작전을 지시했다.

특히 5월5일 딘 군정장관이 조병옥 경무부장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김익렬 9연대장 등과 함께 제주에서 비밀회의를 마련한 가운데 사태원인·해결책을 놓고 군경이 대립했다.

미군정은 수뇌부 회의 다음달인 5월6일 평화적 해결을 노력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제주에는 강경 진압의 길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전시공간도 4·3의 해결과 관련해 미군정·경찰과 9연대 사이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실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주, 5·10선거를 거부하다

5월10일 남한 단독선거일이 다가오자 전국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제주에서도 무장대는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무장대가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냈다. 선거 당일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산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가 선거가 끝난후 마을로 되돌아왔다.

5월10일 남한 단독선거일이 다가오자 전국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제주에서도 무장대는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무장대가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냈다. 선거 당일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산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가 선거가 끝난후 마을로 되돌아왔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결과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북제주군 갑, 을의 2곳에서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해 무효화, 미군정은 재선거를 명령했다. 하지만 투표 보이콧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재선거 마저 무기한 연기됐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 제6사단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 모든 토벌작전을 진두지휘토록 했다. 박진경 신임 9연대장은 무차별 작전을 전개한 공로로 부임후 한달도 되지 않아 대령으로 특진했지만 6월18일 부하에 의해 피살됐다. 당시 암살사건 연루혐의를 받은 4명이 처형됐다.

제주도 선거구 2곳의 투표 무효에도 남·북 정부가 제각각 수립된 가운데 김달삼이 북한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북한 정권을 지지함에 따라 제주도는 '초토화작전'의 더 가혹한 진압정책 앞에 놓이게 됐다.

전시공간에도 5.·10선거 반대를 위해 산행을 결심한 주민들의 모습을 평화로운 한라산 자락의 풍경으로 연출하고 있다.

특히 돌확에 투사된 물 영상은 제주도 오름 산정호수의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신기루 같은 허상임을 함께 전달하면서 단선반대의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훈석 기자 hspark@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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