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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학살터에 평화·인권의 나무를 심다[4·3 60주년 지상유물전] 다시 시작하는 4·3 (14) 흐르는 섬
박훈석 기자
입력 2008-07-15 (화) 10:09:23 | 승인 2008-07-15 (화) 10:09:23

   
 
  ▲ 제15회 백조일손영령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19(음력7월7일)일 오전 서귀포시 대정읍 백조일손묘역에서 열린 가운데 참가한 유족들이 합동차례를 올리고 있다. <박민호 기자>  
 
제주4·3평화기념관내의 5관 '흐르는 섬'은 4·3 진실규명운동의 역사를 보여준다. 진실규명은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국가 공권력은 자신들이 자행한 제주도민 집단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4·3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금기했다. 또 공권력에 기댄 누군가는 4·3의 진실을 덮기 위해 소신을 굽히며 제주사회를 업압했다. 하지만 진실에 터를 잡은 누군가는 혹독한 고초를 겪으면서 진상규명의 물꼬를 텄다. 4·3 발생 30주년인 1978년 제주출신 소설가 현기영씨가 발표한  「순이삼촌」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묻혔던 진상규명운동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발판을 마련했다.<전문>

△격동의 4·3 진상규명 세월

'흐르는 섬'은 제주사회의 4·3 후유증과 진상규명 역사가 맞물리면서 진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954년 9월21일 한라산 통행을 금지시켰던 한라산금족령이 해제, 4·3이 끝나면서 폐허가 된 마을 복구와 정착사업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4·3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국가 공권력은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로 유가족들을 얽어맸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고문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빨갱이) 컴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 당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육지부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1960년 4·19 혁명직후 봇물처럼 터진 유족·학생과 국회진상조사위원회 등의 4·3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인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 다시 암흑의 세월에 파묻혔다. 하지만 제주출신 소설가 현기영씨가 1949년 1월의 북촌리 주민학살사건을 다룬 「순이삼촌」을 1978년 발표, 제주4·3의 진실을 전국에 알리고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현기영씨는 이 소설 발표로 당시 정보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순이삼촌」으로 발판을 마련한 진상규명운동은 1980년과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학생·재야단체·학술·언론·문화계 및 제주도의회 등을 중심으로 다시 전개됐다. 특히 4·3 50주년을 맞아 1998년부터 불기 시작한 특별법 제정운동으로 1999년 12월 정기국회에서 '4·3특별법'이 통과, 2000년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정부 진상조사 및 희생자 신고가 이뤄졌다. 결국 2003년 10월 진상보고서가 확정된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 잘못된 국가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화해·상생으로 4·3을 승화한 제주도는 2005년 세계평화의섬으로 지정됐고, 평화·인권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평화공원 조성 및 평화기념관 건립 등의 다양한 기념사업과 명예회복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냉전·정치공작 희생양, 제주도민

5관에 소개된 전시물은 진상규명운동을 시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집대성했다.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학살작전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맨손으로 일으켜 세운 제주사회의 자치공동체 복원운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을 재건사업 속에서도 제주도민들은 끝나지 않은 4·3의 후유증에 시달린다.

토벌대에 의해 가족이 희생된 이유만으로 유족들은 연좌제에 얽매여 공직진출이나 승진, 사관학교 입학, 해외 출입 등에서 온갖 불이익을 당하는 등 대물림된 멍에를 안고 살았다.

대물림됨 멍에는 연좌제에 그치지 않았다. 제주4·3 당시 붉은 색으로 덧씌워진 제주도민들은 4·3이 끝난후에도 냉전과 정치공작의 희생양이 됐다. 1965년 공안당국이 발표한 소위 '민족민족혁명당 사건'의 연루자 모두가 제주도민이었다. 1년전의 도쿄올림픽 구경과 유학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도민들을 공안당국은 고문 끝에 '북괴공작원 일당'의 혐의를 씌웠다.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한 번 찍혀진 붉은 낙인은 평생 이들을 괴롭혔다. 

또 재일동포로부터 학교건물증축비를 희사받은 한 중학교 교장, 초등학교 동창을 일본에서 한 번 만난 제주교육대 학장이 고정간첩으로 조작되는 등 4·3 당시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하나에 소중한 생명을 잃었던 제주도민들은 '레드 컴플렉스'의 또다른 사망선고 앞에서 고통을 겪었다.

살아남기 위해 6·25 전쟁에 자원 입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해병대 3·4기의 제주사람들, 일본으로 피신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오사카 이쿠노쿠에 거주하는 제주사람 등의 이야기도 평화기념관에서 흐르고 있다.

△기억과의 투쟁, 진실찾기 50년

총상과 창상, 고문의 흔적은 온 몸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후유 장애자들은 60년이 흐른 지금도 통증에 잠못 이루고, 팔다리가 마비되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소외된 채 당시 고통을 숨죽이며 생활하다가 '무명천 할머니'처럼 세상을 하나, 둘씩 등지고 있다. 본명이 진아영인 무명천 할머니는 경찰의 총격으로 턱 부분에 심한 총상을 입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몸에 새겨진 기억은 진실 찾기의 원동력이 됐다. 4·19 혁명직후의 신두방 제주신무 전무와 학생은 물론 1978년의 현기영씨를 비롯해 1980년대 학생, 언론 등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모든 이들이 공안당국에 탄압을 받으면서도 진실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 화해·상생의 정신을 토대로 끊임없이 계속된 진상규명운동은 제주도의회 4·3피해조사보고서, 4·3특별법 국회제정, 국가진상보고서 확정, 대통령 공식 사과, 세계평화의 섬 등 평화·인권의 나무를 심는 밑거름이 됐다. 

'흐르는 섬'은 암울한 시대를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4·3 진실찾기 운동이 숨겨지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은 운동이었고, 인권회복을 위한 민주화 운동이었음을 방문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박훈석 기자  hss9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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