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옛 탐라인들이 입었던 가죽옷을 보고 한복(韓服)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탐라인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중시했던 덕판배를 한선(韓船)이라 하지 않는다. 돌과 펄의 문화가 다르고, 강과 섬의 풍토가 다른 때문이다.    

덕판배는 제주선(濟州船), 토선(土船), 섬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종종 등장한다. 유감스럽게도 한선을 거론할 때 위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선이라고 명명된 육지배(陸船) 또한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있었고, 그 갈래를 찾으면 여럿이다.

배는 바다와 전쟁에서 목숨을 구하는 도구인 까닭에 중국, 일본, 유구 배들의 장점을 보완하며 흘러온 것도 한선의 한 역사다. 고대 탐라 또한 일본이나 중국을 드나들며 그들의 배에 관심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었고 배를 선물로 주고받기도 했다.

여기에 바로 문화의 상호작용을 뺀 '문화의 고유성'이라는 것의 허구성이 잠재한다. 소위 한선이라고 부를 때에 그 속에는 민족주의가 담겨 있으니, 덕판배도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문화는 강압에 의해 정착되는 것이 아니다. 조선 600년의 유교의 칼바람을 견딘 무속처럼, 외부적 주장이 강해도 내부적 효용성이 약하면 문화는 쉬이 정착되기 어렵다. 덕판배가 한선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문화는 유형적(有形的)으로 남지만 결국은 언제나 무형적(無形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문화의 중심에는 항상 프로(匠人)가 있었다. 마지막 덕판배 목수 고 김천년 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어른을 먹물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했다.

이제, 제주대학교박물관과 국립제주박물관 모두 덕판배 실종의 역사적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두 박물관 모두 이익을 보고자 아침에 덕판배를 취하여, 손해 보지 않고자 저녁에 이를 버린 꼴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만들 때의 용역보고서는 없고, 뜯을 때의 용역보고서만이 졸아든 채 두 박물관이 함께 역사의 격랑(激浪)에서 표류를 자청하고 있다. 제주문화가 덕판배와 함께 침몰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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