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사)제주환경연구센터 사무처장)

일요일 아침 '올레' 걷기 행사장.

전날 비가 왔던 것과는 다르게 날씨가 맑다. 내가 좀 늦게 간 편인데도 계속 사람들이 몰려든다. 모여 있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아는 얼굴이 보인다. 채 다섯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아이들도 있다. 단체로 온 사람들은 모여서 신나게 준비운동을 한다. 들뜨고 떠들썩한 게 꼭 장날 같다.

구호를 한 번 외치고 출발! 서너 명씩 몰려 걸으니 시골 농로가 가득하다. 앞으로도 뒤로도 행렬이 길게 늘어난다. 그저 시골 농로를 따라 걸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린다.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그림처럼 놓여 있다.

발길은 바람 거센 대정 평지를 돌아 모슬봉으로 향한다. 제주도에서 묘지가 가장 넓다는 곳. 거기 모슬봉에 올라 죽은 자들 곁에서 제주를 보았다. 아, 죽은 자들의 시선에 담긴 환상적인 제주 풍경. 늘 거기 그 자리에 있던 한라산이며 바다, 가파도와 마라도였건만 어째서 이런 풍경을 몰랐을까.

모슬봉을 내려오니 다리가 좀 뻐근하다. 타박타박 걷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풀썩 바닥에 주저앉아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서 걷는 길은 마을길이다. 적막하다. 사람 하나 볼 수 없다. 하긴 이 좋은 날씨에 다들 일 하러 가고 없지, 누가 있으려나. 개 한 마리가 무료한 듯 짖지도 않고 우리들을 구경한다. 빈 마당에는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만 나부낀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돌담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숲길로 들어선다. 아! 곶자왈이다. 어딜가나 곶자왈, 곶자왈 그렇게 떠들더니 이렇게 걸어보기는 처음이다.

곶자왈은 발길을 내디딜 때마다 얼굴을 바꾸며 우리를 맞았다. 고개를 숙이고 덩굴터널을 지나면 빛도 잘 들지 않는 깊은 정글이 되고, 또 조금 지나면 금세 햇살 화사한 평지가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이라이트는 곶자왈에 만들어진 숲길. 아름다운 숲길로 전국에 소문 난 곳이란다. 무릉도원을 걷듯 아담한 숲길을 걷는다.

곶자왈을 벗어나니 다시 마을이 나온다. 아, 여기는 내 고향이다. 친가며 외가 친척이 다 모여 사는 동네. 결혼 전에는 명절마다 찾아가던 고향이다. 그런데 그 뒷동산에 내가 방금 지나온 환상적인 숲길이 숨어 있었다니.

종점을 향해 걷는데 눈에 익은 동네 친척 집들이 보인다. 어린 날 놀던 물통도 보인다. 방학 때 다니러 오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거기서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먹곤 했던 곳이다. 앞서 가던 몇몇이 연못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는다.

종점에 도착하자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오늘 걸었던 곳들이 금세 스쳐 지나간다. 차를 타고 달리면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를 하루 종일 걸었다. 그저 창밖으로 스쳐 지나던 곳, 바로 그 곳에 그토록 놀라운 풍경들이 숨어 있었다니. 더 천천히 걷다보면 더 아름다운 제주와 만날 수 있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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