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명(동화작가)

팥을 삶기 시작한지 한 시간 가량이 지나자, 팥 삶는 향기가 집안 구석구석으로 가만가만 스며들기 시작했다. 엊그제 지난 21일은 일년 24절기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는 동짓날이었다.

매년 동짓날이 되면 나는 어린 시절의 골목길에 서있다. 학교를 갔다가 돌아오는 하교 길, 집골목에 들어서면 구수한 팥 삶는 냄새가 제일 먼저 내게 달려와 안기곤 했다. 구수하게 삶긴 팥 냄새에 시장기를 잔뜩 느낀 나는 대문을 밀고 집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커다란 솥 가득 팥을 삶고 팥물을 내려 받으며 팥죽을 쒔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작은 공장을 했다. 공장 식구들이 여럿 있어서 어머니는 늘 바빴다. 하루 다섯 끼니의 식사를 챙겼으니 얼마나 바빴을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머니를 많이 도와드리지 않았던 일이 참으로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야간작업을 하는 날이면 밤참을 또 해야 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결혼하고 나는 내 아이에게 정월보름엔 오곡밥을 동짓날엔 애기 동지만 아니면 팥죽을 쒀서 먹인다. 또 작은 아이 손에 하얀 찹쌀반죽을 올려놓고 동그란 새알을 빚어내게 하는 재미는 함께 느껴보지 않은 엄마는 잘 모를 일이다. 

푹 삶겨져서 툭툭 터진 팥을 건져다가 체에 내린다. 팥물에 걸쭉한 팥앙금이 내려앉고, 다시 보글보글 끊으면 불려 두었던 쌀을 털어 넣는다. 검붉은 팥물 속에 담겨진 하얀 쌀알갱이들의 모습은 그 순간 참 화려하다. 어둠과 밝음이 서로 섞여서 아름다운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때이기도 하다.

팥죽에서 새알과 쌀은 밝음을 상징한다고 했다. 겨울이라는 어둠이 지나고 곧 봄이라는 밝음의 세상이 온다는 희망의 의미를 가진 팥죽이라고도 하고, 태양을 상징한다는 팥을 삶아 죽을 쒀서 칙칙하게 묵은 기운을 몰아내고, 선한 새로운 기운을 불러들인다는 의미로도 팥죽을 쑤었다고 어머니는 동짓날이면 들려주었다. 

동지팥죽! 좀은 번거로운 것처럼 느껴져도 사실 해보면 그다지 번거로운 일만은 아니다. 동지 전날 미리 가족끼리 둘러 앉아 새알을 빚어 놓으면 일은 더 수월하다.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 스며드는 팥 삶는 냄새는 특별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푸근함을 안겨줘 요즘 유행하는 향기요법은 이에 견줄 바가 못 된다. 게다가 팥 삶는 냄새에 나쁜 기운들이 물러간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빌린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일석이조를 넘어 일석삼조 아니 일석오조는 족히 되는 일이니 자녀를 가진 엄마라면 일년에 한번쯤은 해 볼만한 집안 행사라고 권장하고 싶다.

오늘, 점심은 조금 남은 팥죽을 데워 맛나게 먹어야겠다. 그리고 저만치서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는 희망찬 기축년(己丑年)을 두 팔 벌려 마중 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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