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기당과 한학의 대가 간재(艮齋) 전우 선생에 사사
중국 서예가들 수암작품에 "대단한 명필" 칭찬 일색

땀만이 성공으로 가는 계단을 열어준다. 능력을 인정받는데 있어 '무대'는 장식일 뿐 그릇이 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작업장 이름을 '무본재(務本齋·노력하는 것이 근본이다)'라 했을 만큼 글 쓰기를 즐겼던 故 강용범에 있어 섬은 단지 자신을 지지하는 바탕이라는 의미가 전부다.

좋은 글을 위해 수행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당시 효행과 문필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더 높게 평가됐다.

강용범(1900~1953)은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하(正夏), 호는 수암(修庵) 또는 소석(小石)이라고도 한다.

강용범은 1908년 아홉살때 전주 한학의 대가인 간재(艮齋) 전우 선생에게 입문, 2년간 한학을 배우면서 필법을 사사했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임헌회 문하에 들어가 명성을 떨쳤던 전우 선생은 개화파였던 박영효가  수구세력으로 지목,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며 그를 죽이라고 고종에게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설이 있는 인물이다.

강용범 타계 후 동생 기당이 수암의 작품을 감정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들을 만나서 자문을 구하였더니, "(수암의 작품은)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서체로서 대단한 명필"이라고 인정받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기당 강구범 선생은 강용범의 동생이다. 강구범 또한 간재 전우 선생에게 글을 배웠다. 기당은 후에 부모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신천호막공업소를 개업, 후에 유명한 자본가가 됐다. 기당은 만년에 귀향해서 함덕에 해양연구소 건립하여 제주대학교에 기증했고 다시 서귀포 삼매봉 동쪽 기슭에 기당미술관을 세운 후 서귀포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강용범은 한 때 조천리로 이사, 그 곳 문사들과 어울리면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입도조(入島祖) 강 영의 묘소를 어렵사리 찾아내기도 했다.

강용범의 작품들은 현재 서귀포시기당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의 해서와 행서는 일필휘지의 빠른 필력으로 힘과 절도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집으로는 수암유고(修庵遺稿)가 있다.

미술평론가 김유정
정리=문정임 기자 mungdang@jemin.com

 

 

   
 
  강용범 작. '명월' (서귀포시기당미술관 소장)  
 

   
 
  강용범 작. '사무사' (서귀포시기당미술관 소장)  
 

 

   
 
  강용범 작. '출문여빈 수구여병' (서귀포시기당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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