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재다능했던 제주 예술 선각자
1942년 아사히카메라지 주최 사진공모전 입상 제주 사진 예술 효시
탁월한 재능 '정치'까지 연결 눈길…'청탄상'등 후학 양성에도 일조

   
 
   
 
   
 
  김광추 작 '운심월성' (개인소장)  
 

 

   
 
  생전 글씨연습하는 고 김광추 선생 모습.  
 

하늘이 내린 예술가는 만예에 능통하다 했던가. 故 김광추는 회화·사진·서예·전각·수석 등에 두루 견문이 넓고 정치활동에도 관여했던 제주예술의 선각자다.

김광추는 1905년 제주시 화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호는 청탄(聽灘)이다.

김광추는 19세 되던 1923년 서울로 올라가 배재고보(현 배재고교)에 입학, 고희동·김복진·안석주선생 등으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 그림을 공부했고  1932년 다시 제주에 돌아와 고향 학교의 훈도와 의용소방대장, 마을 구장 등으로 활동했다.

그의 예술 선각자적 면모가 드러난 것은 1942년 김광추가 「아사히 카메라」지 주최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하면서부터다. 사진기마저 귀했던 시절 김광추는 사진의 예술성에 주목,  '나루터' 를 출품, 입선함으로써 제주 사진 예술의 효시가 된다. 

1945년에는 제주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다. 1948년에는 4·3사건이 발발하자 광주로 피신하여 의제 허백련, 남농 허건, 화가 천경자 등과 교류하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1957년 김광추는 다시 귀향하여 1960년 제주도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제주시정자문위원, 공화당도당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정치활동 일선에도 뛰어든다.

1963년에는 서예동호인 모임인 담담회, 제주연묵회 창립을 주도하여 이후 10년간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소묵회·영주수석회·삼다수석회·연미수석회·향란회 등 서예·수석 단체 등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에는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한다. 김광추는 이때 받은 상금 전액을 제주도미술전람회에 기탁, 이 해부터 그의 호를 딴 '청탄상(聽灘賞)'이 만들어졌다.

김광추는 사진과 서예, 수석 외에 유화와 전각에도 능했다. 특히 전각 예술에 뛰어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제주 전각의 발전에 질적·양적으로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대표작으로 유화에는 '풍경', 전각작품으로 '소암(素庵)' '금당(琴塘)' '석빈(石濱)'등이 있다.

말년에는 제주시 별도봉 동쪽 언덕에 처소를 마련하고 화훼·수석·서예·전각을 즐기며 여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낸 인자로 회자된다. 1983년 타계했다.

서정주·유치환·허건·홍정표·현중화 등과 교의가 두터웠고, 서세옥·양인옥과도 가까웠다. 

생전 소암 현중화 선생은 "청탄은 내 스승이기도 한 스지모도시유(史邑) 선생에게 서예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청탄은 다재다능했을 뿐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인심도 좋았다. 맑고 깨끗하기가 물과 같았고 서화·전각·수석·분재·사진·도예·난·골동·화훼 외에도 이 고장의 문헌전고(文獻典考)와 고적(古蹟)을 밝혀내는 일까지 전부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그를 기억했다.

 미술평론가 김유정/ 정리=문정임 기자 mungdang@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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