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행정가로 활동한 제주 최초 서양화가
초록색을 주제로 한 풍경화 주로 그려…제주시장 등 행정가로서의 족적도

   
 
  김인지 작 '섬과 포구'  
 

   
 
  김인지 작 '폭포'  
 

   
 
  김인지 작 '한라산이 보이는 풍경'  
 

   
 
  김인지 작 '제주항'  
 

   
 
  故 김인지의 그림 그리는 모습.  
 

   
 
  故 김인지.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故 김인지는 1907년 서귀포시 하예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은 '니하라 다대후(新原健夫)'.

대정보통학교와 제주농업학교를 거쳐 전라남도 도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다. 그해 개교한 좌면공립보통학교(중문교 전신)에 훈도로 발령받아 1931년까지 근무했으며, 1934년에는 동경사범학교 도화강습과를 수료했다.

김인지는 초록색을 주제로 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정방폭포, 천지연 폭포, 한라산, 포구 풍경 등은 그가 즐겨 그린 소재였다. 실제 풍경을 화면에 배치하면서도 건물의 터치는 단순하게 생략하여 그렸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자연을 묘사하거나 경관을 인상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에서 자연주의적인 요소와 인상파적인 요소가 혼합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김인지는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전라남도 최초로 선전에 입선하는 쾌거를 올린다. 하지만 미술평단에서 그의 그림이 인정받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1935년 5월 26일자 조선일보에는 김인지의 14회 선전 입선작 '애(崖)'에 대해 "높다란 낭떠러지 밑에서 빨래하는 것이 화흥(畵興)을 자아낼 수 있습니까? 하늘 공간의 양(量, 體積)을 생각하여 보십시오"라며 제주지역의 풍토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적 발언이 실리기도 했다.

이듬해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다시 그의 작품 '서귀항'이 입선을 했지만 같은해 5월 25일자 조선일보에는 "평범하다. 사진기 렌즈 외에 다른 관조가 없을까. 여기서 완성되면 새 것을 보기가 드물 것이다"라는 비평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2년 뒤 김인지가 다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해녀'로 입선하자 비평계는 김인지에게 높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938년 6월 12일자조선일보에는 "'해녀'는 다시 가감을 허락하지 않을 만치 통합된 가작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였고, 1938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에는  "대작을 보여주기 부탁 한다"라고 당부하는 등 이때부터 김인지의 작품성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김인지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세 번의 입선을 계기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1939년 제주농업학교 도화과 강사로 초빙되면서부터는 학생·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계몽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43년 중문교 교장으로 취임하기전까지 서귀교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동안 주변의 제주 풍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해방후 1948년에는 자신이 교장을 맡았던 제주북교에서 제주의 풍물을 그린 30점으로 양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1955년에는 4·3사건과 한국전쟁의 혼란을 넘어 제주에 미술협회를 결성, 초대 회장이 됐으며 문총제주지부장, 북제주군 교육감, 제6대 제주시장을 역임하는 등 화가이자 행정가로서의 자취를 함께 남겼다.

미술평론가 김유정
정리=문정임 기자 jemin@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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