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인권 절규한 재일동포 화가
도일 64년만에 고향 땅 밟을 수 있었던 분단시대 경계인
4평남짓 방서 가난과 싸우며 사회적 사실주의 미학 추구

   
 
   
 

"송영옥은 '개' 시리즈로 정점을 맞이한다. 그것은 자화상임과 동시에 타화상일수 있는 특이한 회화다. 쇠약함을 보이는 일본 화가들의 작품과 다른 독창성이 있다…바꿔 말하면 슬픔은 사라질 일이 없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일본 미술평론가 지바 시게오는 송영옥의 작품을 이렇게 평했다.

故 송영옥은 1917년 조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29년 측량 기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도일, 전쟁의 광기로 포효하던 일본에서 청년기를 보내면서 전쟁의 비참함과 혼돈을 체험했다. 남북이 갈리자 분단의 틈새에서 어느 한 곳을 선택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 살아가며 사회적 사실주의 미학에 심취했다.

송영옥은 역사적 비극을 주목했다. 4평 남짓한 방에서 가난과 싸우며 리얼리즘 작품들을 남겼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고발에 그치지 않았다. 인류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였고 인권과 평화에 대한 절규였다. 그는 전쟁의 광기를 배척하고 핵무기 살상에 치를 떨었다. 동족끼리의 분단을 미친개에 비유한 작품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는 군부독재의 반인권적 만행을 고발하고 미국에 의해 자행된 '더러운 전쟁' 베트남전을 세계 민중의 이름으로 고발했다. 남북의 극한 대립속에서 민족의 삶과 재일 한국인의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돼 가는가, 차별과 멸시가 어떤 것인가 등은 자신이 몸소 느끼며 살았던 삶을 작품에 녹여낸 주제들이다.

 

   
 
  '고독한 왕자'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어부'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송영옥은 1944년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제주출신 우성 변시지와는 오사카미술학교 선후배 사이다. 1943~1950년 오사카시미술전 가작상, 간사이 종합미술전 다나상, 시장상 등을 수상한다. 미국의 「라이프지」에 작품이 소개 되기도 했다. 1956~1977년 일본의 앙데팡당전, 1958~1962년 평화미술전에 참여했다. 1990년 90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8·90·91년 한일 교류전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 리얼리즘 화가 조양규와 절친했고 북한으로 월북한 정종여와는 동문이었다. 월북 후 조양규의 행방을 알 길이 없어지자 송영옥은 이를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1993년 도일 64년만에 그가 제주 땅을 밟는다. 그러나 이때 그의 나이 이미 76세. 이로부터 수년뒤인 1999년 일본 도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분단의 그늘에서 처절하게 살았던 한 예술가로서 시대정신에 충일했고, 민중적 리얼리즘을 자신의 화력으로 삼은 채 일본 땅에서 살았지만 언제나 평화를 꿈꾸고 반전을 외쳤으며 인권을 옹호했던 우리시대 진정한 예술가였다.


미술평론가 김유정
정리 문정임 기자 mungdang@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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