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경(제주외고 논술교사)

기축년을 맞이하면서 나는 '여유롭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과 '여유로워짐'에 대한 다짐을 했다. 지난 한 해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계산하기에 바빴고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엄마의 냉장고 비우기' 철학을 통해 비움이 주는 행복과 만족을 알게 되었다.

아빠 엄마 두 분이 지내는 친정집에는 부엌에 일반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가 있고, 사무실에 일반 냉장고가 있다. 사무실 냉장고는 사업적인 용도 때문에 놓여졌지만 활용적인 면을 따지고 보면 부엌 냉장고와 마찬가지니 엄밀히 말하면 냉장고가 세 대나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냉장고 용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냉장고를 하나 더 구입하더라도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엄마의 고민 아닌 고민이다. 그래서 엄마는 매일매일 '냉장고 비우기' 행사를 하신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란다.

며칠 전에는 사별하시고 혼자 지내시는 아빠 친구 분께 김치 한 통을 드리셨고, 지난 주말에는 담가놓은 장아찌를 종류별로 포장해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이웃으로 지내는 젊은 장애인 부부에게 선물 했다. 그제는 냉동실에 계절 별로 얼려둔 과일과 청국장을 서울서 내려온 사촌 언니에게 한 보따리 챙겨 보내셨다. 그리고 지난 달에는 최고급 제주산 자연 미역을 꺼내 이웃 집 삼촌에게 출산한 딸 미역국 끓여주라면 갖다드렸단다.

물론 엄마의 냉장고 비우기의 막대한 수혜자는 나다.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콘테이너와 아이스박스를 동원한 냉장고 비우기를 하시니 나는 그것들을 텅 빈 내 냉장고 속에 차곡히 정리해 두었다가 한참을 먹으면 되니까 말이다.

엄마는 누구든지 우리 집 현관으로 들어와서 엉덩이를 잠시 붙였다가 나갈라치면 잠깐만 하고는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담아 보내시고는  "아~ 시원하다! 그런데 내가 뭘 줬는지 알 수가 없네. 이렇게 비워봐도 며칠 있음 또 꽉 차니까 문제야!" 항상 이러신다. 나는 냉장고가 꽉 차야 뿌듯한데 우리 엄마는 냉장고가 비워질수록 행복하시단다.  "냉장고를 비우면 기분이 좋아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베풀고 도움 받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그런데 문제는 비우면 비우는 시간보다 더 빨리, 비운 양보다 더 많이 채워진다는 거야. 비우다 봐도 채워지니 냉장고를 만족스럽게 비워두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엄마의 냉장고 비우기는 단순한 냉장고 공간 확보의 의미가 아니다. 정을 나누고 나눈 정이 몇 배의 고마움과 정으로 돌아오고 또 다시 더 많은 감사와 사랑이 베풀어지니 그야말로 엄마의 냉장고는 화수분인 셈이다. 우리엄마 마음이 진정 화수분인 것이다.나는 엄마의 그 높은 내공을 언제쯤 따라 잡을 수 있을까.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