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소설가)

   
 
  양혜영(소설가)  
 
삼월에 접어 자주 비가 내린다. 겨우내 굳은 동토의 살얼음을 녹이고 새순을 틔우는 봄비다. 지난 겨울이 전례 없이 추웠던 탓일까. 아직 남아 있는 추위에 옷깃을 단단히 그러쥐면서도 내리는 봄비를 설레발로 반긴다.

봄이란, 그런 모습인 것 같다. 철이 덜 든 아이가 꾸는 몽상이랄까, 아니면 시한된 삶을 보내는 노인의 마지막 희망이랄까. 봄이 오는 길목에 서면 우리는 설탕가루로 솜사탕을 만들어내듯 이제 막 움튼 새순이 거대한 꽃무지로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꿈꾼다.

얼마 전 아들이 3년간 다니던 어린이집을 떠나 유치원에 입학했다. 두텁게 박음질된 새 이름표를 달고 유치원 문을 들어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가 막 걸음을 떼던 어느 해 봄을 떠올렸다. 어그적어그적 팔자를 그리며 옆으로 벌어지는 걸음을 힘겹게 떼어 엄마를 향해 걸어오던 아들과의 첫 소풍. 하늘은 누군가의 시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르고, 서툰 아이의 걸음이 우스운지 벚꽃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화르르화르르 꽃보라를 흩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아이가 자라서 '봄날'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찬 바람이 살갗을 에일세라 잔뜩 움츠리고 최대한 걸음을 재촉하는 겨울이 아니라, 더위로 숨을 헐떡이며 그늘을 찾아 종종거리는 여름이 아닌, 말갛게 물기를 머금은 흙에서 올라오는 내음을 맡으며 천천히 걷고 싶어지는 봄날처럼 여유로운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아이가 가끔 불어 닥치는 찬바람에도 곧 따스한 햇살이 비출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는 봄과 같은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봄에는 누구나가 꿈을 꾸기 마련이다. 시샘 많은 꽃샘추위가 난데없이 찾아들고, 채 가시지 않은 추위의 끝물이 한라산자락의 잔설처럼 우리들 삶을 우울하게 감아 돌지만, 꿈처럼 아른하게 다가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 겨울동안 짓이겨놓은 새싹들도 봄이 찾아오면 도심의 시멘트 틈바구니를 비집고 올라온다.

그 봄이 돌아왔다. 유난히 아름다운 이 봄, 누군가에게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향기가 나고, 고단한 삶에 웃음 머금을 수 있는 봄날 같은 사람으로 다가가고 싶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