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고작가지상전> <19> 청계 김성택
한문일색 서예계에 둔중하고 예리한 한글서예 내 보인 선구자

   
 
   
 
故 김성택(사진)은 1917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청계(淸溪). 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문서예 일색이던 제주서예계에 호방한 한글필체를 선보인 선구자격 예술가이기도 하다. 행초서에 능했던 그는 이를 한글서예에 접목, 동양 한문의 문자미를 발현하던 당시 서예계를 아름다운 한글 미학으로 촉촉히 적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성택은 1935년 일본 오사카 제미제이심상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주물공장, 양철 절단공장, 용접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며 독학으로 일본 나라(奈良) 국민학교 초등과 준훈도시험에 합격, 제주 세화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교감, 장학사, 초등학교 교장, 교육감, 교육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비사범계 출신이라는 폄하를 무색케 했다.

 

   
 
  김성택 선생 피력  
 

   
 
  생전 환갑 당시 모습.  
 

   
 
  1978년 영주연묵회 출품작 10곡병.  
 

   
 
  김성택 작 '의'  
 

김성택은 일생 서예를 예술이전에 교육의 한 방법으로 삼았다.  '도(道)라고 생각하면 이미 도(道)가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듯 그는 교육과 예술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일상에서 선보였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다만 한 사람의 교육자로만 알았으나 작품을 보면 그는 결코 조용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의 한글서예작품은 멈춤과 흐름이 만나는 교통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둔중함과 단아·예리함의 대화였다. 이미 행서와 초서를 익혔던 그의 자신감은, 둔중함으로 큰 것은 멈추게 하고, 빠른 붓놀림으로 작은 것이 그 큰 것을 감싸듯 흐르게 했다. 작은 흐름은 큰 것에 의해 더욱 빨리 휘돌아들고, 큰 것은 그 빠른 흐름 때문에 더욱 굳게 버티어 선다. 산과 시내의 관계를 보는 듯 산 속의 계곡은 언제나 청아한 물줄기의 생동감을 지니게 하는 것, 청계의 작품을 본 소감이다.

청계는 자신의 일생을 한글 서예에 바쳤다. 한글은 그 출발이 매우 창의적이었던 만큼, 이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욕구 또한 오랜 시간 지대하게 이어졌다. 전 생애를 한글의 미려함을 위해 힘쓰고, 한글에 교육 철학과 민족의 긍지를 담았던 청계 김성택은 한국 한글 서예의 선구자였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은 까닭에 개인전은 뒷전이었다. 예술가의 이력이라고는 제주도 한자서예의 중요 단체인 영주연묵회 회원이었던 것 뿐이나 그는 당당하게 한글이라는 새로운 길을 걸었다.

김성택은 1971년 제주예묵회를 창립하여 한글을 지도하면서 이 땅에 한글의 아름다운 하늘을 펼치고자 했고, 명실공히 제주도 한글의 수준을 한국에 드높였다. 그는 김광추, 김순겸과 함께 모충사 건립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1978년, 예묵회 정기전 오픈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갑자기 별세했다. 향년 61세였다.

미술평론가 김유정
정리 문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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