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61주년 기획 : 끝나지 않은 진상규명의 역사 5. 4·3이름 찾기

제주4·3 평화기념관에는 백비(白碑)란 이름의 비석이 있다. 일반적으로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지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옆으로 눕혀져 있다. 61년전 발발한 제주4·3역사가 현재까지도 성격이 완전히 규명되지 못한 채, 미완성의 역사로 남아 있음을 비석은 전언하고 있다. 진상규명이 완전히 이뤄지지 못했기에 백비는 눕혀져 있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제각기 해석되고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백비는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울 수 있으리라'면서 지금 세대가 다시 시작해야 할 완전한 진상규명의 책무를 일깨우고 있다.

   
 
   
 
△제주4·3, 이름 짓지 못한 역사

1990년대 이후 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제주4·3이'4·3'으로 불려지기 전까지 제주4·3은 퐁동, 반란, 학살, 사건, 사태, 항쟁 등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4·3'의 성격을 규명할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4·3이름 찾기'논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4·3특별법 제정,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확정 이후 '4·3사건'으로 정의된 4·3에 대한 정명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5년 4·3특별법 개정과정에서 '4·3사건 정의 수정'논의와 요구가 있었으며, 수난사적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도민의 저항정신은 사라져버린 현실 타협적 성격이라는 비판 역시 4·3토론회 때마다 잇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이름을 찾지 못한 채 4·3, 4·3사건, 4·3항쟁으로 불려지는 것은 미진한 진상규명, 명예회복에 한계를 드러내는 법·제도적 조치 등 4·3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과 같다.

4·3의 정명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과제로 남았다. 4·3 61주년을 맞아 4·3의 올바른 이름을 찾기 위한 노력이 재요구되고 있다.

△4·3의 완결은 정명에서부터

4·3 진상규명의 일부 역사인 4·3의 정명은 여전히 묻혀 있다. 4·3특별법 제정, 4·3사건진상보고서 확정, 대통령 사과 등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이름없는 4·3은 여전히 미완성의 4·3을 대변해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4·3은 일어난 배경과 원인 등에서 찾아야 하는 '항쟁'의미가 사라진 채 반쪽의 역사로 해석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설가 현기영씨는 4·3의 정명(定名)작업이 향후 4·3역사의 시발점임을 강조했다. 현씨는 4·3은 그동안 수난사로서만 이야기돼 왔다. 하지만 피해·수난이 있으면 반드시 저항이 뒤따른다. 공동체가 엄청난 수난을 당했는데, 저항이 왜 없었겠는가. 그것에 색칠을 해선 안 된다. 이젠 떳떳이 저항했던 부분을 말해야 한다면서 4·3의 제 이름 찾기 노력을 주문했다.

고희범 제주4·3 진상규명 명예회복추진 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은 "4·3사건진상보고서는 4·3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었으며, 사건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 새로운 사료나 증거가 나타나면 보완할 수 있다"면서 "4·3의 성격을 담아 정명을 찾는 일은 역사를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4·3의 완전해결은 4·3의 정명 찾기에서 비롯돼야 할 것이다. 이상 늦출 수 없는 '4·3이름 찾기'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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