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운·한국은행 제주본부장>

   
 
   
 
영화 「워낭소리」의 관객수가 300만명을 넘어섰다. 대규모 자본을 끌어 모아 전세계적인 흥행몰이를 하는 블록버스터가 아닌 독립영화, 그것도 다큐멘터리 형태의 영화가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것은 한국 영화계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평범한 팔순의 농부와 마흔이 넘어가는 소가 주연이다. 둘의 30년간의 동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한 해 동안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다. 유명한 스타가 출연한 것도 아니고, 지루하고 늘 반복되는 농촌의 하루하루를 소재로 담았다. 이런 영화에 관객들이 그렇게 감동할까 싶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감동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가축이면서 일꾼인 소와 귀먹고 절룩거리는 늙은 농부가 오랜 친구처럼 묵묵히 동행하는 모습. 숨가쁜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이 이 모습에 향수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별 감동적인 대사도 없이 화면에 클로즈업되는 늙은 농부와 소의 눈빛, 그리고 깊이 패인 주름…. 그 속에서 둘이 동행한 세월의 깊이와 또 그만큼 깊은 우정에 도시인들이 감응한 것이 아닐까.

제주 올레길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 마지막주 무릉2리에서 용수포구까지의 제12코스 개장식에 참여한 인원이 예상보다 많아 교통혼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관광 제주의 저력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도민들 어깨가 절로 으쓱 올라간다. 제주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물론 환율 상승으로 해외에 나가기 어려워 제주를 찾은 탓도 있으리라. 하지만 보다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제주의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매력을 오롯이 담고 있는 올레를 관광자원으로 승화시킨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답답한 현실을 잠시 피해 자신 속으로의 여행을, 벗과 가족들 마음속으로의 여행을 도와주는 길잡이가 되고 분위기도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육지의 농촌길과 달리 제주 올레를 걸으면 때로는 언뜻언뜻 수평선이 보이기도 하고, 굽이진 골목길을 따라 까만 현무암 돌담이 색다른 감흥을 자아낸다. 높은 빌딩과 자동차의 홍수에 숨막힌 도시인들에게는 동화처럼 아련한 개구쟁이 시절로 회귀하는 환상을 자극할지도 모른다. 구멍이 숭숭나 있어 바람가릴 것 없는 돌담 사이로 대문이라고 하는 것이 자그마한 돌기둥(정주석)에 걸쳐진 나무(정랑) 세 가닥이다. 인심도 그처럼 넉넉하리라 상상하고도 남는다.

제주 올레길에 「워낭소리」가 겹쳐진다.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것이다. 눈만 즐거워서가 아니라 느릿한 걸음 속에 맛이 있음을 공유한다.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면서도 삶 속에 녹아 있는 문화적 알맹이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바람과 물로 씻겨지는 정화의 체험과 이질적이지만 원형에 가까운 문화에서 향수를 달래어 충만감을 얻는다.

12개 코스이외에도 더 많은 올레 코스가 소개될 것으로 기대한다. 제주도가 지닌 천부의 관광자원을 모두 함께 즐기는 일은 지역발전을 위하여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코스개발에 경쟁이 생긴다거나 지나치게 인위적인 요소를 가미하려는 과욕이 개입될까 걱정되기도 한다. 올레를 찾는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원형을 지키면서 순례자의 편의를 위한 지혜와 배려를 더하는 정도의 절제가 지속되기를 원한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노오란 유채꽃과 풍성하게 만발한 왕벚꽃나무가 완연한 제주의 봄을 대변하고 있다. 바람이 불면 스멀스멀 옷깃을 파고드는 쌀쌀한 날씨가 여전히 계속된다. 마치 지금의 경제상황과 비슷하다. 기지개를 켜는 듯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싸늘한 냉기가 감돈다. 마음을 일깨우는 「워낭소리」와 같이 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에 제주의 숨결을 담아갈 수 있도록 올레를 가꿔 간다면 경제의 봄도 그렇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놀멍 쉬멍 올레 걸어보게 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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