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자(제주도여성특위 여성사정립분과위원장)

   
 
   
 
세상을 살다보면 나날이 새로워지는 문명적 발전에 경탄 할 때가 많다. 유리알 속에서 퍼져 나오는 환한 불빛과 작은 네모 상자 속에 숨어있는 유명인들의 모습, 스위치 하나로 전달되는 깨알처럼 박힌 문서들의 재현이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또 다른 문명의 새로움을 경험하며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몇 달 전 미국에 다녀왔다. 아들아이의 얼굴도 보고 사업적 정보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많았다. 안가본 것은 아니나 방문할 곳과 그 대상이 개인적인지라 현지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챙겨야하는 부담이 만만치 않게 다가왔다. 현실의 촉박함에 준비도 못하고 달랑 주소하나 가지고 광활한 대륙을 밟았다. 게다가 언어도 유창하지 못한 사람이 차량만 있으면 될 것이라 생각해 렌터카 예약만을 신경 썼으니.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적잖은 나이에 어떻게 렌터카 하나로 미국을 돌아보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모든 것은 기우였다. 차안에 비치된 작은 기계로 인해 근심거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비게이션’에 입력된 행선지는 가고자하는 위치에 대한 정보로 바뀌어 정확히 화면에 들어섰고 동시통역을 하는 가이드처럼 우리말로 전달되었다. 게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기라도 하면 바로 노선을 수정해 이내 다른 길을 찾아주는 영민함이라니. 

나는 보조석에 앉아 운동경기를 중계하듯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반복해서 읊주렸다. 처음으로 외국에서 운전을 하게 된 남편도 이내 여유를 찾아 고속으로 달리는 외국차들의 질주를 뚫고 하이웨이를 편안히 드나들었다. 만약 네비게이션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무사히 찾아가기는 했을까. 멀게만 느껴졌던 과학의 힘으로 나는 낯설고 긴장된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나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한순간 인생의 길을 잘못 들어 한없이 절망적일 때 다시 걸을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삶의 구원자. 새삼 친정 노부(老父)가 그립다. 혹여 마땅치 않은 곳으로 들어설세라 고집 센 외동이를 부여잡고 죽는 날까지 놓지 않으시던 억압의 손길. 내 길의 안내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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