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소설가

작은 소란이 인다. 뭔가를 피해 비껴서는 사람들 사이로 노인이 나타난다. 새까맣게 녹이 오른 자전거를 탄 노인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페달을 밟으려 애를 쓴다. 하지만 앙상한 노인의 다리는 양쪽 페달을 동시에 밟지 못하고 번번이 한쪽 페달을 허공으로 놓쳐 노인의 자전거는 아기걸음보다도 느리게 움직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나는 오래된 기억 속에 잠식해 있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예전 내가 살던 시장 뒤편에는 붉은 페인트칠로 '어름집'이라 써 놓은 가게가 하나 있었다. 평수를 헤아릴 것도 없이 작은 가게 안에는 스티로폼으로 감싸고 함석으로 덧대어 만든 간이 냉장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두운 조명과 냉장고 주변에서 흐르는 하얀 김이 바닥에 고여 있어 마치 관 속을 들어가는 것처럼 서늘해지는 곳이었다.

시장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얼음가게 주인 김씨는 냉장고에서 큼직한 얼음을 꺼내 커다란 톱으로 잘랐다. 김씨가 어깨 근육을 꿈틀거리며 신명나게 톱질할 적마다 얼음이 갈라지는 틈새로 하얀 얼음톱밥이 분분하게 날렸다. 눈꽃을 만들어내는 광경 같다고 할까. 아이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느라 긴 여름해가 지도록 얼음집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김씨가 얼음을 자전거 뒤에 싣고 시장 안으로 배달을 나가면 얼른 가게로 들어가 얼음톱밥을 서로의 몸에 뿌리며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냉장고가 집집마다 들어오면서 얼음집은 문을 닫는 일이 잦아졌고, 얼음집 김씨도 시장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소식을 알 수 없던 그 김씨가 갑자기 세월을 뚝 잘라먹고 노인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겨우 알아볼 정도로 김씨의 모습은 변해 있다. 좋던 풍채는 앙상한 뼛가죽으로 남았고, 머리칼도 다 빠져 민둥산같은 머리알이 햇빛에 번들거린다. 마치 얼음처럼 단단하던 젊음이 세월에 녹아 허물어진 모습이다.

그렇게 남루한 행색으로 김씨는 삐걱대는 자전거를 타고 예전 얼음집이 있던 곳을 향한다. 벌써 오래전 누군가에 의해 낯선 건물로 변한 지 오래인데.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그곳을 향하는 김씨를 보며, 나는 어릴 적 '어름집'에서 산 얼음 한 덩이로 만든 화채가 눈물나도록 그리워진다.  <양혜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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