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경 <제주외고 논술강사>

딸아이를 재운 후 쌓아둔 설거지와 빨랫감을 정리하니 시간은 어느 덧 자정이 가까워졌다. 이 시간이 되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확 풀리면서 뽑아놓은 티슈처럼 흐물거리게 된다. 엔돌핀 충전을 위해 TV를 켜고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 리모컨을 열심히 눌러댔다. 순간 멈춘 TV화면 속에서는 하프 마라톤 완주에 도전해서 뛰고 있는 연예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프로그램 제목처럼 '남자의 자격' 중 하나로 마라톤을 선택한 것이었다.

겨울비가 내리고, 겨울 바람이 부는 날씨 속에서 마라톤은 커녕 평소 운동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살던 그들이 완주를 향해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짜릿해져 왔다. 처음엔 자신의 프로그램 때문에 시작한 도전이었겠지만, 겨울 도로 위를 달리면서 그들은 자신만의 완주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3시간이라는 제한 시간 안에 피니시 라인을 밟아야 하는 하프마라톤에 도전한 그들 중 몇몇은 3시간을 훌쩍 넘어서 도착을 했다. 뒤늦은 그들의 완주 모습은 남자가 아닌 진정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이뤄낸 완주의 의미를 곱씹으며 TV를 끄고 눈을 감았다.

함박눈이 새벽의 검은 하늘 위에서 쏟아져 흩어지고 나는 또 지난 몇 달간 나의 모습을 돌이켜 반성하고 후회하고 또 다짐을 했다. 한달전 나는 대학원 졸업을 위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나는 수많은 핑계와 안일함과 게으름으로 논문을 준비했고 결국 1차 발표에서 많은 지적을  받았다. 예상하고 있었으며, 당연한 결과였다. 지도교수님과 동기들의 따뜻한 격려를 들으면서도 나는 또 한 바구니 가득한 핑계와 상황의 어려움을 구차하게 토로하고는 논문쓰기를 다음 학기로 넘겨버렸다. 그리곤 나를 이렇게 다독거렸다.

'그래, 강혜경 너무 힘들게 갈 필요는 없어!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하면 되는 거야. 그동안 많이 힘들었으니까 남은 12월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쉬기만 하는 거야!' 

하지만 눈을 감은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중도포기자라는 수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지도교수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마라톤은 완주해야 의미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함께 논문을 준비한 동기 중 한 명은 졸업의 영광을 안게 되었는데 너무 부러워서 축하를 해 줄 수 있을까 의문이다(하하하). 그리고 한 명의 동기는 중도 포기 대신 멋진 완주를 선택하고 최종 심사까지 도전했다. 나는 그 동기를 통해 또 한 번 완주의 의미를 깨달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멋진 자세를 배웠다. 그녀는 매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졌고,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가졌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상대를 격려하는 멋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완주! 우리의 삶에서 완벽한 완주라는 것이 있을까. 나는 연예인들이 보여준 하프 마라톤 완주의 모습과, 동기의 모습을 보면서 완주라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완벽함이 아니라 최선의 노력과 열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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