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 (소설가)

이내에 잠긴 겨울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순식간에 까무룩 저물어버리는 노루꼬리 닮은 겨울해를 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져 자연스레 이별이니 소멸이니 하는 어두운 단어가 떠오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겨울과는 이별을 서두르게 된다. 어두운 계절이 어서 지나고, 추위가 사그라져 새순이 움트고 색고운 백화가 만발하기를 바라게 된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시린 계절이 주는 황량함이 싫어 특별한 약속이나 별다른 계획이 없으면서도 봄이 서둘러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올 겨울과의 이별이 못내 아쉬운 사람이 있다. 매일 새벽 서귀포에서 첫차를 타고 5·16도로를 넘어 대학병원 중환자실을 오가는 그에게는 올 겨울이 조금만 더디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의 아내는 9년째 후두암을 앓고 있다. 이미 전신으로 종양이 전이되었고, 팔순을 넘은 나이 탓에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올 겨울이 마지막 계절이 될 것이란 통보를 받았다.

지난 가을 끝물에서 시작해 벌써 두 달이 넘는 시간을 하루에 두 번 삼십분씩 허락되는 면회를 위해 그는 밤사이 꽁꽁 얼어버린 산길을 넘나들었다. 그 역시 팔순을 넘은 나이라 장거리 이동이 힘에 부칠만한데도 그는 늘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가면서 조금씩 아내와 이별하는 연습을 한다고 한다. 내일 아침이면 아내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의연하게 보내는 준비를 밤새 텅 빈 잠자리를 뒤척이며 되새긴단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밤사이 다짐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지난밤을 무사히 견뎌낸 아내를 볼 생각에 설레고,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민다고 한다. 60년 이상을 함께한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일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계절. 이미 겨울은 많이도 지나버려 살얼음낀 대지 아래에선 새싹들이 그 뾰족한 촉수를 내밀며 얼굴을 들이미는데. 매일 수분이 빠져나간 나무처럼 말라가는 아내를 위해 그는 지나는 계절을 붙잡고 싶어 한다. 저만큼 앞에 와있는 봄을 기다리는 무리들 뒤에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붙들고 시간이 더디게 흐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는 여명이 번지는 새벽하늘을 머리에 이고 오늘도 고도를 넘어 아내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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