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언 땅 녹이고 꽃망울 터뜨리느라

‘해마다 부지런하던’ 봄이 올해는 지각을 했다.

3월 1일∼4월 12일 약 6주간

서울의 평균 기온은 5.6도로 1996년 이후

14년 만에 가장 낮았다.

강원도 등지의 개나리 진달래는

최대 2주나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11월 17일 부산에서 30년 만에 가장 빨리 첫 눈이 내렸다. 올 1월 서울에는 관측 이래 최대 폭설(4일·25.8㎝)이 쏟아졌다. 지칠 줄 모르던 눈에 2월 전국 강수량은 과거 30년간(1971∼2000년) 평년치보다 배 이상 많았다. 4월 들어서는 23년 만에 서울의 봄철 최저기온(14일·1.2도)이 기록됐고, 남부지방에도 눈발이 흩날렸다.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올 4월 중순까지, 5개월간 한반도는 사실상 겨울이었다.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시 ‘수선화’로 예찬했던 영국의 봄도 올해는 제 시간에 오지 못했다. 우리나라 카네이션처럼, 노란 수선화는 3월 18일 영국 ‘어머니날’ 선물로 쓰인다. 3월 초면 피기 시작하는 이 꽃이 한 달이나 늦은 4월 들어서야 피었다. 어머니날을 앞두고 영국인들은 수선화를 구하기 위해 꽃집과 들녘을 헤매야 했다.

4월 중순 일본에 내린 눈은 41년 만이었고, 미국 동북부 보스턴 지역의 3월 강수량은 사상 두 번째로 많았다. 지난 겨울 ‘∼년 만의 한파’란 보도가 잇따랐던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지구 북반구는 일제히 ‘봄의 지각’을 겪었다.

북극과 태평양의 ‘고열(高熱)’

기상청은 올 봄이 늦어진 이유가 북극과 태평양에 ‘고열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수리(북극)와 배꼽(태평양)에 고열이 오르자 북반구에는 오한(惡寒)이 났다는 의미다.

북극의 온도는 북극진동지수(AOI)로 가늠한다. 북극의 찬 공기가 일정한 주기에 따라 강약을 되풀이하는 현상이 북극진동, 이를 수치화한 것이 AOI다. 북극이 더워질수록 AOI가 낮아진다. 지난 2월 이 수치는 1950년 이후 최저 수준인 -4 아래로 내려갔다.

정준석 기상청 기후예측과장은 “북극의 이상 고온 현상으로 냉기가 중위도(위도 20∼50도) 지역까지 내려왔다”며 “그래서 기상청이 파격적으로 4월 초순까지 쌀쌀하리라 예보했었는데 ‘추운 봄’이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고 말했다.

대기권 상층부에서 온도 차가 큰 두 공기가 만나면 편서풍인 ‘제트기류’가 형성된다. 북반구는 북극권의 찬 공기와 남쪽의 따뜻한 공기가 만나는 경계면에 제트기류가 생겨 냉기의 남하를 막아주는 병풍 역할을 한다.

제트기류는 두 공기의 온도 차가 클수록 세고, 병풍 효과도 크다. 북극에 열이 나서 남쪽 공기와 온도 차가 줄면 제트기류는 약해진다. 이렇게 약화된 제트기류가 병풍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북극권 찬 공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봄의 진로를 가로막은 것이다.

기상청이 꼽은 두 번째 이유는 ‘유사 엘니뇨’. 엘니뇨 모도키(‘비슷하다’는 뜻의 일본어 접미사)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진짜 엘니뇨가 발생하는 동(東)태평양이 아닌 중(中)태평양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는 걸 말한다.

이달 초 중태평양 해수면 온도는 평년보다 0.9도 높은 평균 28.4도였다. 진짜 엘니뇨 발생 해역인 동태평양(평균 27.9도)보다 따뜻하고 수온 상승폭도 더 컸다. 정 과장은 “지난해 6월 시작된 유사 엘니뇨가 그해 12월 중태평양 해수면 온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폭설 폭우 등 기상이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태평양 바닷물이 따뜻해지면 한반도에 더운 공기가 더 많이 흘러든다. 이 공기가 약해진 제트기류를 뚫고 내려온 찬 공기와 만나 기록적인 폭설 폭우를 빚어내면서 정상적인 계절의 변화를 방해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와 小빙하기

북극과 태평양의 고열이 올 봄을 지각생으로 만들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면 지구는 왜 이런 열에 시달리는 걸까. 여기서부터는 의견이 갈린다.

태양 흑점의 활동이 달라졌다거나 지구 자전축 기울기가 변했다는 가설도 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한쪽은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가 가져온 지구온난화 때문이라 하고, 다른 쪽은 자연스런 기후변화 사이클이라고 주장한다. 두 주장을 각각 뒷받침하는 논문이 최근 한국 학자들에 의해 발표됐다.

지난해 9월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 예상욱 한양대 해양환경과학과 교수가 ‘기후변화 속 엘니뇨의 특징’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예 교수팀은 온실가스 농도 변화를 가정한 11개 모델을 만들고 각각 시뮬레이션을 통해 중태평양 해수면의 고온 현상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증가 때문임을 입증했다.

유사 엘니뇨와 온실가스의 연관성을 세계 최초로 확인한 논문이다. 예 교수는 “온실가스가 증가할수록 더욱 다양한 형태의 이상기후가 발생할 수 있다”며 “지난 겨울의 이상 한파와 올 봄의 이상 저온도 온실가스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달엔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지질학자 윤호일 박사팀이 남극 세종기지 앞 맥스웰만의 수심 100m 해양 퇴적물을 분석한 논문을 미국지질학회지에 발표했다. 지구에 500년 주기로 4번 ‘소(小)빙하기’가 있었으며, 온실가스와 상관없이 지구는 자연의 거대한 사이클에 따라 더워졌다가 추워지기를 반복한다는 내용. 윤 박사가 세종기지 대장으로 근무하며 진행한 연구였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 빙하가 녹아 바다에 담수가 유입되고, 담수가 섞이면 적도지방에서 내려온 난류의 염도가 낮아져 해류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며, 그렇게 되면 해류를 타고 진행되는 열 교환도 멈춰 온대기후 지역까지 한파가 닥친다는 게 소빙하기론이다.

윤 박사는 “지구는 현재 온도 상승기를 거의 다 거치고 소빙하기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다. 지난 겨울과 올 봄의 이상 기온도 이런 사이클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영국 국립해양학연구소도 2005년 네이처에 소빙하기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2003년 미국 국방부의 ‘대규모 기후변동을 가정한 안전보장 보고서’에도 소빙하기의 도래를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확률의 싸움

결론은 없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공인된 건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 보고서다. IPCC는 2007년 4차 보고서에서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기후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는 온실가스 무해론, 지구온난화 회의론, 기후변화 음모론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고서 가운데 ‘2035년 히말라야 빙하 소멸설’ 등 일부가 오류로 밝혀지고 영국 기후연구소 이메일 해킹을 통해 보고서의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나면서 신뢰도에 금이 갔다.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들의 반격을 당하면서 논쟁은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그렇다고 ‘기후변화 사이클’의 손을 들어주기도 어렵다. 김지영 기상청 기상연구관은 “과거와는 대기의 성질과 분포가 현저히 다른데 수만년 전의 일을 갖고 기후를 예측하는 건 무리”라고 지적했다.

“거대한 사이클에 의해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면 명확한 기후변화겠지만 최근 이상기후는 너무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일회성, 산발성이에요. 누구도 그 원인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기후학을 전공한 송영배 협성대 도시건축공학부 교수의 이 말은 학계의 고민을 대변한다. 지구는 분명 더워지는 것 같고, 이상한 날씨도 갈수록 빈번해지는데 “왜?”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안순일 연세대 대기과학과 교수는 이런 상황을 ‘확률의 싸움’이란 말로 표현했다.

“현재의 이상기후는 지구온난화가 있든 없든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에요. 다만 온실가스가 온난화를 가져와서 이상기후가 나타날 확률이 더 높다고 판단할 뿐이죠. 지구 온도가 최근 100년 사이 0.74도 상승했는데, 같은 기간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도 260ppm에서 380ppm으로 높아졌으니까요.”<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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