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자행된 소위 ‘예비검속 학살’을 입증해 주는 경찰 자료가 처음으로 집중 공개돼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도영 박사가 1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예비검속 관련 자료는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과 ‘예비검속자 조치의 건’ 등이다.

 우선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은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金斗燦)이 성산포경찰서장에게 보낸 문서이다.

 이 문서에서 김두찬은 “귀서(貴署)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하고 있다.

 이로써 제주에서 벌어진 예비검속 학살극의 총책임자는 제주지구CIC대장이며,군과 경찰 모두 예비검속자 학살집행에 동원됐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CIC대장은 누구의 명령을 받았는지 최고위급 명령권자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국전쟁 당시 해군 포항경비부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예비역 준장은 최근 군 지휘계통을 통해 자신에게 내려졌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과 경찰의 명령계통에 대해 증언한 바 있다(박스 기사 ‘예비검속이란 무엇인가’ 참조).

 한편 이 문서에는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는 서명이 들어 있어 군의 집행명령을 당시 문형순(文亨淳) 성산포경찰서장이 거부했음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1950년 8·9월경 제주도 전역에서 벌어진 예비검속 학살극의 와중에서도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박스 기사 ‘문형순은 누구인가’ 참조).

 두번째 자료인 ‘예비검속자 조치의 건’은 예비검속 당한 김영두(金榮斗·당시 26세·본적 한림면 귀덕리)에 대해 단기 4283년(서기 1950년) 9월 5일 육군CIC가 제주도경찰국장으로부터 신병을 인수한다는 내용이다.

 김영두가 예비검속된 이유는 한림국교 교사로 재직시 ‘3·10 총파업’에 가담했다는 전력 때문이다.3·10총파업이란 4·3발발 1년 전인 3·1절 기념식날 경찰이 시위군중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관람군중에게까지 무차별 발포해 부녀자와 어린 소년을 포함한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자,이에 항의해 대부분의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들까지도 파업에 가담한 전도적인 총파업을 말한다.

 김영두는 4·3이 발발한 후 대한청년단 귀덕리 부단장을 맡았고 다시 제주읍내로 이주해 주정공장에 근무하고 있었으나,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년여 전에 가담했던 ‘3·10 총파업’이 뒤늦게 문제가 돼 예비검속된 것이다.

 이때 김영두는 당시 제주지방법원 판사였던 친형 김영길(金榮吉)을 비롯해 귀덕리 대한청년단 간부 등이 탄원서를 내고 보증을 함으로써 구사일생했지만,대부분의 예비검속자들은 총살당했다.

 이처럼 이도영 박사에 의해 공개된 자료는 한국전쟁 때 재판도 없이 무고하게 즉결총살한 ‘예비검속 학살’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서 향후 ‘4·3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김종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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