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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에 품은 제주 근·현대사의 흔적”[제주잠녀] 3부. 잠녀를 만나다 <158>소리를 따라-구좌읍 고이화 할머니
고 미 기자
입력 2010-06-30 (수) 14:21:52 | 승인 2010-06-30 (수) 14:21:52

   
 
  ▲ 1930년대 물질 나가는 잠녀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발췌’  
 
제주해녀항쟁 산증인…2000년 항일운동기념사업위 제1회 제주해녀상 수상
'펑데기'에서 대상군으로, 저절로 배워진 물질에 한평생 바다 의지해 살아
80년 품은 일제 수탈 상처, 4·3으로 시댁식구에 남편까지 잃어


그 곳에서 시간은 잠시 더딘 걸음을 한다. '너는 늙지 마라'. 이제는 많은 시간 자리에 누워서 또 자주 병원을 오가면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그녀는 눈으로 몇 번이고 이야기한다. 어느 시에서처럼 '나만 늙고 말 테니 너는 늙지 마라'한다.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무기력하고 초라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당당히 한 시대를 거쳐왔기에 아름다운 모습의 그녀는 늙지 않는 바다색 기억을 풀어낸다.

   
 
  ▲ 고이화 할머니  
 
# 바다가 좋았던 '펑데기'

일제 하 최대 여성운동으로 평가받는 제주해녀항쟁(1932년)의 산증인인 고이화 할머니(93)를 만났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고 할머니지만 한 세대를 꼬박 채우는 시간 동안 약해진 기색이 역력하다. 그만 맘이 급해진다.

뜻밖의 사람 기척에 반가워하시는 할머니의 마음을 뒤로하고 자꾸만 옛날을 묻는 일이 무슨 큰 죄나 짓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지난 2000년 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에서 제1회 제주해녀상을 수상한 고 할머니의 이력은 책으로 몇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파란만장하다. 제주 잠녀의 살아있는 기록으로 할머니의 이야기가 조심스레 펜 끝으로 옮겨진다. "아이고, 어머니…" 덥썩 하고 잡은 손 외에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우도 대상군인 어머니의 4남매 중 막내딸이던 고 할머니는 그 때는 누구나 그랬듯 바다에서 컸다. 8살에 개창에서 헤엄을 배우고 6월에는 넙미역을 조물러 바다로 갔다.

고 할머니는 "족쉐눈을 하고 물에 들어가면 그게 신천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바다가 불렀던 때문이리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물건을 구분하고 빗창 등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됐다. 물건이 좋은 바다며 지형을 익히고 더 오래 숨을 참는 것도 스스로 깨우쳤다.

또래보다 체격이 좋아 '펑데기'라 불렸지만 물질을 하는데는 오히려 유리했다. 같이 물질을 하던 언니들보다 물건을 더 잘 골라냈다. 막내였지만 가계를 책임져야했던 고 할머니는 "물질을 해서 번 돈으로 제숙 준비를 해서 기제사도 걱정 없이 치렀다"고 말했다. 잘해야 열 네 다섯 살 때 일이다. 열 다섯부터 일본 츠시마 뿐만 아니라 경남일대와 백령도 등 전국 각지로 바깥물질을 다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집을 마련했다.

고향과 집을 떠나 고된 작업을 하는 바깥물질은 나이 많은 잠녀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기상군'소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 어린 나이에 타지살이가 녹록치는 않았다. 당시 향수와 힘겨움을 이겨내게 했던 것이 해녀노래였다.

그래서일까. 고 할머니의 해녀 노래는 바깥물질을 했던 바다마다 조금씩 다르다.

군산 갈매기 섬으로 가는 길 불렀던 노래에는 "…군산바당은 전깃불만/반짝반짝 혼져가건/해녀들고 매기알을/주워다근 앙먹엉…"한다. 장목 박섬으로 가는 길목에선 "충남은 생복하고/해삼은 엇는듸/여기는 고동셔도/충남은 깅이호곡 다싱거/해녀들은 그거 잡으레간다…"했다. 뭍에서도 턱턱 숨이 막히는 가락에 저절로 숨비소리가 새어나온다.

   
 
  ▲ 성산 진지동굴과 잠녀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발췌’  
 

# 온 몸으로 역사를 기억하다

열여섯이던 1932년을 고 할머니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고 할머니는 일제의 해산물 갈취 등에 맞서 북제주군 구좌읍 일대에서 벌어졌던 제주해녀항쟁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1931·32년 관제 어업조합의 수탈에 맞서 연인원 1만7000여명에 이르는 제주 동부지역 잠녀들이 238차례에 걸쳐 시위를 벌였던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

고 할머니는 1932년 3월 우도 잠녀 270여명과 함께 10여척의 풍선에 나눠타고 구좌읍 종달리 두문포 모래사장에 내려 시위를 벌이다 일본 경찰로부터 고초를 치렀다.

고 할머니는 "일본 순사들이 헛총을 쏘며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자기들 말을 듣지 않으면 허리띠를 풀어 마구잡이로 때렸다"고 그 때의 아픈 기억을 풀어냈다.

할머니의 가슴에는 아직도 당시 구타로 인한 흉터가 남아있다.

제주 근·현대사 소용돌이 속에 제주 여인이 가져야 했던 상처도 고스란하다.
일제 착취에 이어 해방 후 4·3 때 시집식구 6명이 희생됐고 그 여파로 남편까지 잃었다. 그 뒤 혼자 4남1녀를 키우며 끈질기게 바다를 붙잡았다.

'대상군'이 된 것은 저절로도, 원해서도 아니었다. 삶이 할머니를 그렇게 만들었다. 뭍보다는 더 익숙한 바다를 지척에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다 바라기를 한다.

더디기는 하지만 그런 할머니 옆으로 시간은 간다.

'조심해 가라'며 내젓는 손이 "또 언제 오냐"는 질문으로 들린다. 할머니의 바다는 여전히 푸른색이다. 시나브로 옅어지는 기억도 푸른색이다. 기억하는 우리에게도 푸른색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해녀박물관

고 미 기자  popm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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