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장부에 도장 찍어오니라. 도장 안 내놓으면 지장이라도 박아오니라. 지장 안 박아주면 손가락이라도 잘라오니라. 손가락 안 내놓으면 멱이라도 따오니라. 멱 안 내놓으면 조상 묘라도 쓸어오니라. 가서 불이라도 질러뿌라”

영화 <이끼>를 본 이들이라면 이 대사 한줄을 보는 순간 다시 소름을 끼칠 것이다. 이장 (정재연)의 오른팔 ‘덕천’ (유해진)이 ‘유해국’ (박해일)과 ‘박민욱’ (유준상)을 찾아가 무엇인가에 홀린 듯, 이장의 비리를 쏟아내는 장면의 일부다. 무려 3쪽 분량의 대본을 쉴새없이 쏟아내는 유해진의 모습이 관객들 역시 ‘넋’을 같이 놓게 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평가한다. 유해진의 ‘미친 연기력’이 최대의 빛을 발산했다고.

원작 웹툰에서의 ''덕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살려낸 것은 물론, 거기에 유해진의 반전 캐릭터가 더해져 관객들이 느끼는 ’놀라움의 체감 온도‘는 확연히 높아졌다.

지난 1997년 데뷔한 유해진에는 ‘명품 조연’이라는 말과 함께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 스틸러’는 자신이 출연한 장면을 훔쳐가며, 조연급으로 잠깐 등장하지만 뛰어난 연기로 관객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배우를 말한다. 이 단어 하나가 유해진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품 조연’ ‘신 스틸러’ ‘미친 연기력’ 이 모든 단어가 유해진에게 주어졌고, 또 어울린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해진은 <이끼>에서 도장을 아예 박아버렸다.

1970년 충북 청주 출신인 유해진은 의상학과를 다니다가 95년에 서울예대 연극과에 편입한다. 이어 97년에 황정민, 김수로, 성지루, 박희순 등이 실력을 키운 목화레퍼토리컴퍼니에 입단해 오태석 연출가에게 하드 트레이닝을 받는다. 그리고 같은 해 정지영 감독의 <블랙잭>(1997)에 덤프트럭 기사 역할로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자신의 족적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유해진이 관객들 머리 속에 어렴풋하게나마 자리잡은 것은 <주유소 습격사건 1편>(1999)이다. 당시 ‘양아치’ 역을 맡았지만, 썩 잘생기지도 않은 외모에 능청스러움이 더해져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러다 ‘유해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배역의 이름이 더해져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온다. 자기 손을 뒤집어놓고 현란한 칼놀림을 보여준 <공공의 적>(2002) 에서의 ‘용만’은 스크린에서 유해진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이후 등장한 필모그라피.

<라이터를 켜라>(2002) <광복절 특사>(2002) <해안선>(2002) <달마야 서울 가자>(2004) <공공의 적 2>(2005) <혈의 누>(2005) <왕의 남자>(2005) <타짜>(2006) <이장과 군수>(2007)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2007) <트럭>(2008) <작은 연못>(2009) <전우치>(2009)

유해진은 어느새 <왕의 남자>와 <타짜>를 거치면서 ‘조연’에서 ‘주연급 조연’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장과 군수>와 <트럭>을 거치며 ‘실질적 주연’의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전우치>와 <이끼>로 ‘명품 조연’은 ‘조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명품 연기력’과 동일시되는 말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명품 연기력’은 그가 가진 끼에 노력을 더해서 나타났다. 유해진은 이번 <이끼>의 베스트 장면으로 꼽히는 홀린 듯 뱉어내는 고백하는 장면을 위해 제주도에 2박3일간 머물렀다. 넓은 벌판에서 계속 생각하고 감정을 찾아냈고 소리도 질렀다. 그러면서 ‘덕천’이 되어갔고, 현장에서 그는 한번에 그 장면을 끝냈다. 스태프들의 박수는 쏟아졌고, 유해진은 일어나지 못했다. ‘명품 연기’를 선보인 유해진이나 보는 스태프들이나, 그리고 다시 극장에서 관객들도 그 짧은 시간 하얀색 백지를 경험한다.

강우석 감독도 “영화 <이끼>는 배우들 보는 맛이 있는 영화다. 그 중에서도 유해진의 ‘광기’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영화개봉 전 인터뷰에서 거론하기도 했다. 준비되고 또 준비된 연기다.

과거 <왕의 남자> 당시 인터뷰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굉장히 예민해진다. 예전에 설경구 씨가 ”쟤는 애드리브의 ‘아’자까지 생각하는 애야” 했었는데, 그 정도로 매일 밤 잠을 못 잤다. ‘아’가 맞나, ‘요’가 맞나. ‘의외로 겁많소’가 맞나, 용가리가 무식한 애니까 ‘예외로 겁많소’가 더 잘 어울리나. 그런 식으로 준비를 많이 하는 편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사실 유해진이 배우 김혜수와 연인 관계라는 것이 알려진 뒤 많은 사람들은 유해진을 ‘김혜수의 남자’라고 말했다. 유해진의 외모에서 비롯된 평가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거꾸로 김혜수를 ‘유해진의 여자’라고 말한다. 유해진에 대한 높은 평가을 보여준 것이다.

유해진의 다음 작품은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와 박건용 감독의 <적과의 동침>이다. <부당거래>에서는 질 나쁜 건설사 대표, <적과의 동침>에서는 마을 사람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유해진은 또다시 영화 속 인물을 어떻게 그려나갈까 고민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다시 스크린 속 유해진의 ‘미친 연기력’을 기대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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