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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제주그리기는 끝나지 않았다[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54. 폭풍의 화가 변시지
제민일보
입력 2010-08-16 (월) 20:47:31 | 승인 2010-08-16 (월) 20:47:31
화면 속 구부정한 사나이 안에는 6살의 변시지가 함께 하고 있어
일체의 설명 없이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그림이 제대로 된 그림


   
 
  화실에 있는 변시지, 2009.  
 
# 6세에 일본으로 떠나다


변시지는 1926년 5월 29일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아버지 변태윤, 어머니 이사희의 5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原州), 고려 때 충신 변안렬(邊安烈)의 후예이다. 현재 호로 쓰고 있는 우성(宇城)은 '성처럼 울타리를 높게 치고 산다'고 해서 지어진 택호(宅號)였다.

그의 어릴 적 기억은 강한 바람이었다. 여름에 찾아오는 태풍은 초가가 다 날아갈 정도였다. 하늘과 바다는 온통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파도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서홍동 초가의 마루에서 어린 변시지가 밖을 내다보면 육지로 떠나는 배가 햇살 아래 한 점으로 아른거린다. 집과 배 사이에는 온통 밭과 바다뿐이다. 정면으로는 새섬과 문섬이, 좌측에는 섶섬이, 우측 손아래에 범섬이 내려다보인다. 섬들을 너머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은 찬란한 햇살 아래 빙판처럼 펼쳐진다. 초가 뒤편 북서쪽 귤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생물골(生水洞)'마을의 초가지붕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한라산은 푸른 산기운을 머금고 마을을 감싸고 있다. 서홍동 마을 한 켠에 까마귀떼가 이리저리 나무를 옮겨 다니며 날고 있다. 밭 사이 초지에는 조랑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새(茅)밭은 크게 요동치면서 '솨아, 사르륵' 물결치는 소리를 낸다. 6세 변시지의 제주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제주 풍물들은 6세 이전에 저장되었던 환기된 기억들이다.

변시지는 6세 되던 해인 1931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1932년, 오사카(大阪) 하나조에진조고등소학교(花園尋常高等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도 명문으로 알려진 이 학교는 주로 귀족 자재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변시지는 소학교 2학년 때 씨름을 하다가 다리를 다쳤다. 다리를 다쳐 남들처럼 마음대로 뛰어놀지 못하게 되자 그림에 집중하게 되었고, 3학년 때 아동미술전에서 오사카시장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변시지는 수상을 계기로 그림그리기에 한껏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변시지가 소학교 6학년이 되던 1937년 9월에 중일 전쟁이 발발,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는 등 일본 전체가 전시체제에 돌입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불편한 다리를 걱정하여 중학교에 보내지 않고, YMCA 통신 강의로 중학과정을 졸업하도록 하였다. 17세에 유화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변시지는 유화물감 전문점(畵房)으로부터 50호짜리 그림을 의뢰받았다. 농가를 그린 유화 그림은 직접 현장에 가서 그린 대작이었다. 변시지는 그림 자체의 느낌을 중요시 여겼다. 일체의 설명 없이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그림이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여겼다.

세계는 2차대전에 휩싸였다. 변시지는 다리가 아픈 관계로 징집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전선에는 가지 않는 행운을 얻었지만, 막상 미술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크게 노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비천한 일이고, 환쟁이의 앞날이 훤히 내다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몰래 1942년 오사카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한동안 비밀리에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오사카 미술학교 2학년 때 그림을 반대했던 아버지가 작고하였다. 1945년 졸업하는 해에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하였다. 새로운 스승을 만났다. 일본 현대 서양화의 대가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 1890~1964)였다. 데라우치 만지로는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가 설립한 백마회(白馬會) 연구소에서 수학을 하였다. 1916년 도쿄(東京)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제전(帝展)으로 불리는 제6회 문부성미술전람회(1925)에서 <여인의 누드>로 특선을 하였다. 2년 뒤 제8회 문부성미술전람회(1927)에서 특선, 1929년에는 광풍회 회원이 되었다. 그 후 1933년 문부성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 되었고, 1944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1950년 일전운영회참사(日展運營會參事), 1958년 일전평의원(日展評議員), 1960년 일본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데라우치 만지로의 스승 구로다 세이키는 1884년부터 1893년까지 약 9년 동안 프랑스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아카데미 고전적 화풍과 인상파를 절충한 외광파(外光派, Pleinairisme) 화가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 1850~1916)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라파엘 콜랭의 누드화를 계승하여 일본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1896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가 설립되자 최초의 주임교수가 되었고, 그 해에 메이지 미술회에서 독립하여 백마회(白馬會)를 발족시켰다. 이후 데라우치 만지로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폭풍의 바다, 캔버스에 유채, 50호, 1990, 작가소장  
 
# 일본 화단에 명성을 안겨준 광풍상


변시지는 도쿄 이케부쿠로(池袋)의 릿쿄(立敎) 대학 부근에 있는 아틀리에 촌인 파르테논에 살았다. 도쿄의 화가 지망생들은 이 파르테논 아틀리에 촌에 몰려들었다. 무명시인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만든 화실이었다. 화실은 15평형, 20평형, 25평형 등 3종류였으나 가족이 없는 변시지는 15평형에 살았다. 화실 임대료는 지금 환율로 치면 월 10만원 정도였다. 그곳에서 그는 모델을 1주일 단위로 계약하여 열심히 인물에 몰두하였다.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 지 2년이 되던 해인 1947년 그는 처음으로 광풍회전에 응모하여 입선하였다. 그 때 출품작은 <겨울나무>A, B였다. 스산한 겨울나무 사이로 비스듬히 햇살이 비치는 운치어린 그림이었다. 심사위원들은 큰 상을 줄 만큼 높이 평가했으나 무명 화가 변시지에게 입선을 주는 것으로 그쳤다.   

《광풍회사(光風會史)》에 의하면, 변시지는 이듬해(1948년) 광풍회 제34회전에서 광풍상(光風償)을 수상하였다. 수상작은 <베레모의 여인>, <만돌린을 가진 여자>, <조춘(早春)>, <가을 풍경> 등 모두 4점이었다. 이 공모전에서 변시지는 23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광풍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전역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변시지는 광풍상을 수상한 덕분에 1949년 도쿄 긴자(銀座)의 시세이도(資生堂) 화랑에서 첫 개인전(4월 7~11일)을 개최할 수 있었다. 그는 같은 해 광풍회 최연소 회원으로 위촉되면서 다시 한 번 일본 화단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데라우치 만지로가 그림에 계속 정진하기를 바라면서 그림을 마감할 때 쓰라고 붓 다섯 자루를 변시지에게 주었다. 그러나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그만 좀이 슬고 말았다.           

# 귀국에서 귀향으로-끝나지 않은 제주 그리기 

변시지는 1950년 작품<오후>로 일전(日展)에 입선, 1951년 7월 제2회 작품전을 긴자의 시세이도 화랑에서 개최하였다. 1953년 3월 제3회 개인전은 오사카 판큐(阪急) 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7년 귀국하였다.

변시지의 귀국은 어린 시절 6년간의 강한 기억 때문이겠지만, 그 기억이야말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변시지를 한국으로, 다시 제주로 이끌었다. 서울에서의 약 20년 동안의 시간은 변시지 미학의 중간단계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 또한 고향 제주를 향해 놓여진 징검다리에 다름 아니었다.

1975년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제주로 귀향했다. 역시 제주는 그에게 경이로움을 가져다주는 섬이었다. 그 경이로움은 50대에 접어든 변시지의 당대의 풍토에 대한 경이로움이기도 하지만 내면에는 6살 때 정지된 고향의 냄새를 다시 맡는 그런 감흥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장년이 되어 제주에 돌아온 변시지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변시지 그림에는 사라져가는 제주 풍광과 그곳에 살고 있는 바람이 있다. 도시화된 고층 건물에 부딪혀 약화된 바람이 아닌, 우주의 끝으로 달음질치는 태초의 바람, 바다와 섬땅을 구분하지 않고 세차게 엄습해오던,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는 그런 제주바람이다.

50대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길라잡이로 바깥물질하고 돌아온 잠녀처럼 변시지는 바깥세상을 본 후에야 비로소 제주의 참 빛과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구부정한 사나이 안에는 언제나 6살의 변시지가 함께 하고 있다. 44년 전 스크린에다 44년 후의 시각이 덧씌워지면서 새로운 제주의 형상이 탄생하였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내 것이다. 작품을 완성하고 사인이 끝나면 모든 사람의 것이 된다. 그림이란 것이 잘 보이려고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마음 가는대로 그려야한다. 나의 그림은 점점 단순해진다.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점 하나를 찍어도 쾌락을 느낀다. 하나씩 빼는 작업을 한다. 그러나 많은 것이 있는 것 같은 충격을 줄 수 있는 것, 그림의 요소를 빼면서 있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낼 수는 없을까."

변시지는 8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점 하나 때문에 고민을 한다. 그의 제주그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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