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3> 4·3취재반 출범③

   
 
  1988년 6월 문공부에 의해 금서(禁書)가 된 4·3자료집과 소설. 장편소설 『화산도』는 금서 조치 며칠 만에 풀렸다.  
 

"마라토너 같은 인내·끈기 필요하다" 강조
 전용 컴퓨터 도입, 4·3전문기자 탄생 예고

4·3취재반 출범③

마음을 다잡은 나는 4·3취재반 회의를 소집했다. 1988년 3월 20일 전후로 기억된다. 이 회의에서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는 연재 시점이다. "우리가 4·3을 다루면서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질주할 수는 없다. 그러다간 금방 쓰러질 것이다. 이 연재를 제대로 하려면 4만2195m를 달리는 마라토너 같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서 당장 4월 3일 연재를 시작하는 것은 무리이고, 연재 시점을 내년(1989년) 4월 3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둘째는 4·3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관변자료는 대체로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가나 재야의 시각은 '민중항쟁'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흑과 백처럼 첨예한 대립 구도였다. 취재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선입견을 갖지 말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실을 찾아 나서자. 그러다보면 4·3의 본 모습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 아닌가?"

나의 이런 주장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가장 큰 고민이던 연재 시점이 해결되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현대사 관련 서적을 부지런히 수집하기 시작했다. '4·3'이란 글자가 들어간 자료라면 눈을 밝혀 모았다. 4·3이 방대하고 복잡 미묘한 사건인데도, 이를 정면으로 다룬 자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관변자료는 4·3에 관한 몇 쪽 되지 않은 짧은 내용을 기술하면서도 붉은 색의 이념문제로만 도배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눈길을 끈 자료는 1963년 일본에서 펴낸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와 1975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표된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이었다. 이런 글들이 포함된 4·3자료집 『제주민중항쟁』, 『잠들지 않는 남도』가 발간됐으나, 정부에 의해 '금서(禁書)'가 됐다. 그러나 대학가에서는 알음알음 날개 달린 듯 더 잘 팔렸다.

『4·3무장투쟁사』는 4·3의 전체 흐름을 다룬 첫 역사 저술이라는데 의미가 있었지만, 좌익적 시각에 편향되어 있었고, 과장된 면도 많았다. 이에 반해 존 메릴 논문은 최초의 4·3 논문일 뿐 아니라, 미군 자료를 많이 인용함으로써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시 미국적인 관점의 접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들 저자들을 모두 만나 저술의 허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했다.

1988년에는 양한권의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서울대)와 박명림의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고려대) 등 두 편의 석사 학위 논문이 동시에 발표돼 미로 같이 보이던 4·3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때 취재반에게 활기를 불어준 자료가 또 있었다. 미군 자료다. 1980년대 후반에 미군정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비밀 해제된 미군정 정보보고서가 쏟아져 나왔다. 취재반은 이를 입수해서 4·3 관련 자료 발췌와 한글 번역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지금은 폐간됐지만 해방 공간에서 발행되던 전국 신문들도 모두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얻어진 문헌자료와 체험자들의 증언자료가 쌓여가다 보니 카드 관리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4·3취재반 전용 컴퓨터를 도입했다. 당시 양병윤 편집국장은 외풍을 막아주고, 이런 지원에도 앞장섰다. 지금은 흔한 컴퓨터이지만, 그때는 이 컴퓨터가 편집국 제1호이다. 이를 이용해 다양한 내용을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도 만들어졌다.

이런 일에 두각을 나타낸 기자가 고려대 사학과 출신인 김종민이다. 그는 신문사에 들어온 지 2년밖에 안된 신참 기자였지만 치열하고 분석력이 뛰어났다. 거기다 역사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고, 열정적이었다. '4·3 전문기자'는 그렇게 탄생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