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5> 4·3취재반 출범 ⑤

서울·도쿄에서 공개학술행사 동시 개최
제주서 열린 '4·3 강연회'엔 700명 몰려

4·3취재반 출범 ⑤  

   
 
  1988년 4월 3일 일본 도쿄에서 성황리에 열린 4·3 40주년 추도 기념강연회. 일본 역사학자 가지무라 히데키가 강연하는 모습.  
 

4·3취재반이 결성된 1988년은 4·3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런 시대적 상징성을 반영하듯 이곳저곳에서 금기의 벽을 뚫어보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5·16 쿠데타 이후 4·3에 관한 한은 말조차 꺼낼 수 없었고, 시나 소설로 표현해도 범죄가 되던 세상에서 금줄을 걷어내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4월 3일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동시에 공개적인 4·3 학술행사가 열렸다. 서울 행사는 오후 2시 국회 앞 여의도 여성백인회관(가정법률상담소 소속)에서 열렸다. 1987년 서울에 사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로 창립된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가 주최한 행사였다. 제사협은 회장에 홍익대 교수 정윤형, 부회장은 소설가 현기영ㆍ시인 김명식, 총무는 언론인 고희범이 맡고 있었다.

'제주도 현대사의 재조명 - 4·3의 배경과 경과'란 주제로 양한권(서울대)·박명림(고려대)이 발표했다. 두 사람은 4·3관련 석사 논문을 발표했거나 준비 중이었다. 발표장에는 3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주최 측은 공안당국의 훼방을 염려했으나 별 문제 없이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제주신문은 4·3취재반까지 결성했음에도 이 행사를 스트레이트 기사 없이 서울 주재 기자의 '기자수첩'만으로 보도했다. 경황이 없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주최 측도 매한가지다. 이런 중대한 행사를 결행하면서도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일본에서 처음 열린 4·3 강연회는 같은 날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회장 현광수, 사무국장 김민주) 주최로 도쿄 소재 한국YMCA회관에서 열렸다. 500명의 청중이 운집하는 바람에 의자가 부족해 일부는 바닥에 앉을 정도였다.

강연 연사로는 '행동하는 지성'으로 유명한 일본인 동양사학자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를 비롯해 한신대 교수 정하은, 소설가 김석범, 시인 김명식이 나섰다. 이날 행사는 주최 측도 놀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사무국 요원으로 참여한 문경수 교수, 출판사 신간사 대표 고이삼, 도쿄대 대학원에 유학중인 강창일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한다.

혹자는 일본에서 4·3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4·3을 거론하면,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민단은 '반정부 활동'으로 보고, 친북단체인 조총련은 '반혁명 행위'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한반도보다 더 심한 이념 갈등이 재일 동포사회에 흐르고 있었다. 이는 나중에 4·3 취재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절실하게 느낀 점이다.

서울, 도쿄와는 달리 제주도에서는 공개행사 없이 제주대학교 학생들이 4·3 추모기간을 정해 이날 학내 행사로 위령제와 진상규명 촉구집회를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해 7월 23일 제주YMCA회관에서 열린 '4·3 강연회'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재경 제주학우회가 주최한 이 강연회는 제주에서 열린 첫 4·3 공개행사였는데, 700여명이 강연장을 꽉 메웠다. 회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청중들은 회관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았고, 심지어는 울타리나 나무 위로 올라가서 강연을 듣는 사람도 있었다. 강연은 제주대 교수 고창훈, 소설가 오성찬, 시인 김명식이 맡았다. 이 강연장에 4·3취재반 기자들도 대부분 참석했다.

연사들이 민중항쟁 측면에서 4·3을 언급하자 방청석 한쪽에선 심하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주로 무장유격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유족들로 그들의 항의는 매우 거셌다. 이런 분위기에 자극받은 그들은 그해 10월 '4·3 반공유족회'를 결성하게 된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