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7> 「4·3의 증언」 연재 ①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1948년 4월 3일의 설명 패널. 원인에 대한 설명 없이 이날 상황부터 연재하려는 오류를 범했다.  
 
 
편집국장 "모든 책임진다" 각서 회사 제출
4·3 연재 기점 문제로 새로운 고민에 빠져


「4·3의 증언」 연재 ①
해를 넘기고 1989년에 접어들었다. 신문 연재를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41주년이 되는 4월 3일엔 어떤 형태든 기획기사를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재를 4·3의 어느 시기부터 시작할 것인가? 연재의 제목은? 논란을 빚는 용어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입수된 자료들의 진위는? 체험자들의 증언을 어디까지 믿고 인용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취재반을 주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안당국은 "사회 안정을 해치는 일"이라며 여러 경로를 통해 연재 중지의 압박을 해 왔다.

취재반에게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불이익 수준이 아니라, 자칫하면 신문사의 운명과도 직결될 수 있는 폭발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송상일 편집국장은 회사 측의 요구에 의해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기획 연재의 제목은 「4·3의 증언」으로 정했다. '폭동'이나 '항쟁' 등 사건의 성격을 말해주는 꼬리표 없이 '4·3' 그 자체로 이야기하자는 뜻에서였다. 다음은 용어 정리가 문제였다. 가령 도민들이 주로 부르는 '산사람'에 대해서 관변 자료에서는 '폭도' 혹은 '공비'로, 직접 활동했던 사람들은 '인민유격대'라고 호칭했다. 그래서 '무장대'란 중립적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해방 공간의 신문들을 검색하면서 깜짝 놀란 것은, 당시는 '인민'이란 용어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흔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1945년 9월 9일 발표된 극동군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포고 제1호는 "조선 인민에게 고(告)함"으로 시작됐다.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공고해진 반공 이데올로기는 용어마저 변색시켰다. '인민'은 친북적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아놓은 자료들을 검토하면서는 황당할 때가 많았다. 군인이 저지른 북촌 주민 학살사건이 '공비의 소행'으로 기록돼 있는가 하면, 잘못 쓰여진 기록이 재탕된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 조몽구(趙夢九)의 몽(夢)자가 노(魯)로 잘못 인쇄되자 다른 책자에도 계속 조몽구가 조노구(趙魯九)로 기록되는 식이었다. 한번 잘못 기록된 내용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여기저기서 베껴 쓰다보니 날짜, 장소 등 기초적인 사실조차 어긋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상황도 제대로 기록된 게 없었다.

이런 오류는 증언자들의 구술 내용에서도 나타났다. 심지어 '4월 3일'이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기억의 한계성도 있었지만 일부는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해 '편집된 기억'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특히 사건 발생 시점에 대한 구술 가운데는 오락가락한 경우가 많아 혼선을 빚기도 했다. 왜곡·부실투성이 자료 때문에 난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4·3 진상규명의 필요를 절감하고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4·3취재반에겐 수집자료 가운데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작업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자료와 자료, 문헌자료와 증언 사이를 교차하면서 비교 검증하고 미진한 것은 다시 보충 취재하는 일을 반복했다.

나는 '4·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담고 있는 1948년 4월 3일 상황이라도 철저히 추적하자고 취재반을 독려했다. 그날의 상황부터 연재를 시작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취재반은 4월 3일 그날 무장대로부터 습격을 받은 화북·신엄·한림·남원·성산 지역 등을 누비며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 결과 기존 관변자료 기록들의 허구가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원고를 쓰려고 하니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4월 3일의 상황은 그 전에 있었던 복합적이고 누적된 전사(前史)의 한 기폭점일 뿐인데, 이를 연재의 기점으로 삼으려 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날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한 설명 없이 집필해야 하는 부담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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