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8> 「4·3의 증언」 연재 ②

   
 
  제주신문 1989년 4월 3일자에 보도된 「4·3의 증언」 제1회. '13세 소녀가 겪은 4·3'과 '4·3의 시기 구분'으로 한 면을 채웠다.  
 

'13세 소녀 겪은 4·3' 특집 기획으로 첫선
 며칠 뒤 "폭도가 학살" 오보 소식에 경악

「4·3의 증언」 연재 ②
연재의 제목을 「4·3의 증언」으로 정한 뒤, 1989년 4월 3일 첫 연재 기사를 집필하다 보니 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다루기엔 준비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앞에서 밝혔지만 1948년 4월 3일 상황을 집중 취재하여 그 자료는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4·3 전사(前史)에 대한 자료는 미흡했던 것이다.

첫 연재를 4월 3일 일어난 일만 장황하게 보도했을 때 '원인 없는 4·3'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이래저래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취재반은 두 가지 일을 추진했다.

하나는 4·3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4·3 이전 2기, 4·3 이후 8기 등 모두 10기의 '4·3의 시기 구분'을 도표로 만든 것이다. 4·3의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4·3 이전> 제1기 인민위원회 주도기(1945. 8. 15.~1947. 2. 28.) 제2기 미군정 공세기(1947. 3. 1.~1948. 4. 2.)

<4·3 이후> 제1기 무장대 공세기(1948. 4. 3.~5. 11.) 제2기 경비대 주도 토벌기(1948. 5. 12.~10. 19.) 제3기 사태의 유혈기(1948. 10. 20.~12. 31.) 제4기 육해공 합동토벌기(1949. 1. 1.~3. 1.) 제5기 선무 활동기(1949. 3. 2.~5. 15.) 제6기 소강 상태기(1949. 5. 16.~1950. 6. 24.) 제6기 대대적 예비검속기(1950. 6. 25.~10. 9.) 마지막 토벌기(1950. 10. 10.~1954. 9. 21.)

다른 하나는 4·3의 비극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개인의 체험담을 싣기로 하였다. 그것이 바로 '열세살 김순애 소녀가 겪은 4·3'이란 특별 기획이었다.

취재반이 만난 김순애는 쉰네 살의 여인으로, 13세 때 4·3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었다. 중산간 마을인 안덕면 동광리가 고향인 그녀는 외할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유지들과 외숙 내외,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동생이 군인의 총에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자신도 살기 위해 산으로 피신했다가 '폭도 아닌 폭도' 생활을 했다. 나중에 하산한 어머니는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이 됐다.

이런 비극사를 담담하게 이야기 하던 김순애 여인이 끝내 "어느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울먹임에 취재하던 기자도 눈물을 쏟고 말았다.

1989년 4월 3일자 제주신문 1면 톱기사는 '40년 침묵의 비극사가 입을 연다'는 제목 아래 4·3취재반의 본격 활동상을 알렸다. 한국 언론사상 처음 시도한 4·3연재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당시 4·3 연재물 제목 등은 송상일 편집국장이 직접 달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그는 4·3취재반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3면에 실린 「4·3의 증언」 첫 기사는 '김순애 소녀가 겪은 4·3'과 '4·3의 시기 구분'으로 전면을 채웠다.

공안당국이 즉각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보도내용을 믿을 수 없다면서 취재 경위와 취재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신문에 난 희생자 중 한 사람이 "토벌대가 아니라 폭도가 학살한 죽음인데 오보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심정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한 보도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즉각 취재반을 투입하여 진위 조사에 나섰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