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9> 「4·3의 증언」 연재 ③

   
 
  1989년 4월 21일자의 「4·3의 증언」 제7회. 첨예한 중앙당 지령설에 대해서도 양쪽 주장을 싣는 등 초기 보도는 매우 신중을 기했다.  
 

피해상황 뒤집어 '국가유공자' 등록 확인
어떤 자료든 의심…반복된 "철저한 검증"

「4·3의 증언」 연재 ③

4·3취재반이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검증이었다. 오류와 왜곡투성이의 자료들을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체험자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다가는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자료, 어떤 증언이라도 일단 의심의 눈으로 봤다. 내가 취재반원들에게 입버릇처럼 외쳤던 것이 '철저한 검증'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의 분위기를 전하는 날씨도 추측이나 증언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상대에 확인하여 기술했다.

새로운 자료와 증언을 입수할 때마다 속단하지 않고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심정'으로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검증 과정을 반복했다. 나는 집필과정에서 신문에 인용되는 증언에 대해서는 반드시 당사자와 통화해서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4월 3일자에 보도된 「4·3의 증언」 첫 연재부터 오보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토벌대에게 희생되었다고 보도한 사망자 중 한 명이 '폭도'에게 당했다는 것이 반론의 취지였다. 그 근거로 해당 희생자는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어 있고, 그 유족들은 정부로부터 일정액의 지원도 받고 있다는 것이다.

4·3 당시 토벌대는 민간인들을 향보단, 민보단, 청년방위대 등에 가입시켜 마을 방위나 토벌 작전에 동원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희생되기도 했다. 정부는 이런 희생자 수백명에 대해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가유공자로 선정하여 예우했다. 4·3 당시 같은 죽음이라도 무장대에게 피해를 입으면 '국가유공자'로, 토벌대에 의한 희생은 '폭도' 또는 '좌익분자', '빨갱이'로 취급되던 세상이었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동광리에 가서 재조사를 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한결같이 그 해당 희생자가 토벌대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는 말인가? 그 경위를 추적해 봤더니, 인척 중에 경찰관이 있어서 피해 상황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다.

'오보' 소동의 첫 위기를 벗어난 4·3취재반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4·3의 증언」을 정기적으로 연재하며 가속도를 붙여 나갔다.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지역별 상황을 자세히 기술하는 한편, 이날 상황을 기록한 기존 자료의 왜곡사례도 신랄하게 지적했다.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4월 3일 상황에 관한 자료 비교표'를 만들어 습격 상황, 피해 상황의 다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있지도 않았던 '감찰청과 경찰서의 점령' 등을 기록한 관변자료 뿐만 아니라, 피해 상황을 심하게 부풀린 자료의 맹점도 들춰냈다.

연재를 하면서는 충분한 사료가 없어 논리적으로 확증할 수 없을 때는 아무리 심정적 확신이 드는 경우에도 논리 전개를 삼갔다. 대신 쉽사리 단정할 수 없는 내용은 그동안 수합한 자료와 증언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의 판단에 맡겼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로당 중앙 지령설' 논쟁이었다. 이전의 관변자료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북한 또는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4·3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못박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제주도당의 독자적 행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너무도 예민한 사안이어서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제목도 '지령설'과 '독자적 감행설'이 팽팽하게 엇갈린다는 수준의 중립적 내용으로 뽑았다.

그러나 나중에 중앙당 지령설의 원조 격인 박갑동, 지령설을 기술한 교과서 집필진 등을 대상으로 취재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이 드러났다. 결국 4·3취재반은 얼마 뒤에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 행동'이었다고 수정·보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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