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능은 무엇인가.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죽은 원혼들의 한을 풀고 넋을 달래는 일종의 굿과 같다고 하자.그렇다면 직업 역사가의 역할은 제대로운 신명나는 굿판을 여는 데 있다.특히 자신의 존재에 대해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사라져간 이름 없는 무명씨들을 위해 진혼굿을 여는 것이 역사가의 일이다.

 어쩌면 역사는 강자의 기록과 다를 바 없다.역사의 곳곳에는 강자를 위한 기억으로 윤색되어 있고,어두운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약자의 이야기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지금까지 제국주의 시대를 논할 때 약소민족의 이해는 관심 밖의 주제였고,근대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약자와 여성의 역할은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약소민족이 없는 제국주의 역사는 공허한 것이고,노약자와 여성이 빠진 근대 자본주의 역사는 기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들에 대한 망각에 깊이 고뇌하지 않았고,우리 또한 침묵으로 일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역사가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단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잊혀지기를 강요받던 망각의 역사를 기억의 역사로 바꾸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이는 그들의 삶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나 약자를 위한 배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일구어 온 역사의 중요한 담당자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당연한 몫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여성의 역사를 망각의 역사에서 기억의 역사로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사는 우리의 문제의식의 전환을 요구한다.역사란 본래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예컨대 미국 역사의 기원이 그렇다.흔히 미국사의 출발을 통상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776년 또는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에 발을 들여놓은 17세기초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미국의 역사를 200∼300년으로 보는 시각은 어디까지나 유럽인의 관점일 따름이다.아메리카 대륙에도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디언 문화의 오랜 전통이 있다.콜럼버스가 찾은 아메리카는 신대륙이 아니며,그의 발견은 발견이 아닌 유럽인에 의한 침략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미국의 역사학자인 애플비는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며,어떻게 그것을 하고,왜 그것을 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그렇다.역사가는 소외되고 잊혀진 역사의 약자편에 서서 과거의 편린들을 기억해내야 한다.

 억울하게 살다간 자의 입장에서 넋을 달래주지 못하는 굿판은 제대로운 굿판이 될 수 없다.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망각의 터널로 쫓아내는 역사는 진정한 인문학의 범주에 머물 수 없고,‘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 본연의 임무도 상실하고 만다.

 여성을 망각의 역사로 남겨두는 것은 인류의 절반 이야기를 외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인식의 범위를 편협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여성의 삶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연쇄작용이 역사의 큰 흐름으로 작용해 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여성사가 목표하는 방향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굴해 내는 일이다.

 우리는 여성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망각의 역사를 방치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그리하여 새롭게 찾아낸 역사의 원동력들을 인류문명의 발전에 동참시킬 때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박애도 남성을 위한 이념이 아닌 진정 모든 인류가 추구해야 할 것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김은석·제주교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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