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2> 4·28평화협상 실상 ②

   
 
  '4·28 평화협상'의 당사자인 김익렬 연대장(오른쪽)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총성은 멈췄으나 각종 유언비어 나돌아
김 연대장, 오라리방화 소식에 대경실색

4·28평화협상 실상 ②
"이윤락 중위를 찾아내라"는 과제를 내린 지 며칠 만에 고홍철 기자가 흥분된 어조로 "찾았다"는 보고를 해왔다. "부산에서 새마을금고 이사장도 하고, 목욕탕도 운영하는 것 같다"는 근황을 전했다. 1989년 6월께였다.

나는 즉시 고 기자를 부산으로 급파했다. 이윤락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의 사촌 형으로 평통 자문위원을 맡고 있었다. 9연대 정보참모로서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했다가 파면당한 그는 41년만에 평화협상에 관해 말문을 열었다. 그의 말은 "역사가 이렇게 왜곡될 수 있는 것이냐? 없는 일을 잘도 지어내는게 역사란 말인가?"는 항변으로 시작했다.

그는 평화협상이 좌익세력의 농간으로 진행됐다는 등의 기존 관변자료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서울로 호송된 후 육사 3기 동기인 김창룡 특무대장이 '좌익과 내통했다는 사실만 시인하면 신분을 보장하겠다'는 회유책을 쓰기에 '동기까지 잡아먹으려고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털어놨다.

부산에 파견된 고 기자로부터 이 중위가 당시 상황을 거침없이 증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제주 초빙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2박3일의 제주 초청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도착 첫날은 호텔 방에서 장시간 증언 채록을 했다. 다음날부터 모슬포 9연대 병영과 오라리 방화 현장 등을 둘러보며 보충적인 증언을 들었다.

   
 
  대정중 교사 시절의 김달삼(본명 이승진) 이력서  
 

그는 4·28 평화협상은 김 연대장의 지시를 받고 자기가 직접 추진했다고 말했다. 1948년 4월 28일 정오께 모슬포 부대를 떠난 지프에는 김 연대장과 자신, 그리고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박경훈도 같이 탑승했다. 그러나 무장대 진영에 이르러 박경훈의 입장은 거절당했다고 한다.  

김 연대장과 이 중위 두 명이 안내된 곳은 다다미방이었다. 구억국민학교 교장 관사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 방에는 김달삼과 참모 1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4명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앉았다. 주로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 갔다.

회의는 장장 4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 속에서 고성이 오가고, 회담이 결렬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3가지 사항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냈다.

협상 내용은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협상의 주인공 김익렬 연대장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당시 나이 27세였다. 무장대 총책 김달삼은 대정면 영락리 출신으로 당시 23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李承晋). 일본 도쿄중앙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나와 대정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남로당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고 있다가 1947년 3·1사건 이후 도당 조직부장을 거쳐 군사부 총책으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협상이 끝난 후 총성이 멈추었다. 그러나 곧이어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시간을 벌기위한 폭도들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당했다" "연대장이 폭도 두목과 내통했다" "연대장이 기만전술로 귀순자들을 한데 모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모슬포 연대 본부에서 보고를 받은 김익렬 연대장은 대경실색했다. 무장대가 불을 질렀다면 그것은 평화협상을 파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김 연대장은 직접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프에 동승했던 이윤락 중위는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연대장님! 사실조사 결과 그놈들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판명되면 우리도 본격적으로 토벌에 나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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