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 "형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붓다와 제자 수보리가 불교의 근본 사상에 관한 토론의 한 부분입니다. 그 의미를 지금처럼 혼탁한 때에 곱씹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붓다는 깨달은 자신을 비유 들어 종교의 신비성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운 일이나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적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이 때 종교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것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로 바라보게 하는데 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나'를 열어서 마음을 비운 세계입니다. 어떤 한정된 형색이나 논리 또는 고정화된 한 가지 가르침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인 까닭은 업(業)의 분별에 갇혀 바르게 보는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체적인 생명의 장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연기실상(緣起實相)인 생명의 전체적인 어우러짐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세인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게 했던 '우담바라'가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의 한 사찰에 피었다고 합니다. 약 1cm 크기의 녹두알 만한 작은 꽃이었습니다. 『법화의소』에 보면 "우담바라는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는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 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곤충학자의 말을 빌어 '풀잠자리의 알'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사회가 얼마나 혼탁해 있고, 또 이상세계의 지도자를 우리사회의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가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찰은 근대 한국 불교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경허선사의 입산 출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님은 일제의 어려운 상황에서 의식에 빠져 신비한 힘을 빌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할'을 하며 결사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상황에 스님이 살아오신다면 무엇이라 하셨을지 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 10월 23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스님들과 재가자들 20여명이 낙동강 천삼백리 길을 도보 순례하는 출정식이 있었습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 황지에서 종류지인 부산 을숙도까지 한달 동안 걸으면서 그 주변의 환경 실태를 살펴본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국제적인 카지노 장을 연 태백 부근에 10만톤 가량의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것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새로운 결사운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담바라는 모양지을 수 없는 청정한 국토의 꽃입니다. 모든 생명관계의 조화로운 바탕에서 그 꽃은 피어나는 것일 뿐 어떤 특별하고 신비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담바라는 1300리 길을 걷고 있는 그 분들의 마음 마음에 피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의 국토가 병들어 가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이미 병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익된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병든 이가 볼 수 있는 꽃이라 한다면 아무리 많이 핀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묵묵히 실천하며 깨어 있을 때 그 마음에 필 것입니다.<오 성·김녕백련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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