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족회 행불 희생자 유해 71구 장례식 14일부터 엄숙히 봉행
유가족 60여년 지나 장례 기쁨·슬픔 교차…4·3평화공원 안치

   
 
  4·3행방불명자 유해들이 가족들의 품에 안겨 양지공원에 도착, 한줌의 재가 돼 4·3평화공원에 봉안됐다. 김용현 기자  
 
"60년이 흘러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에 다시 태어나신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60년동안 구천을 떠도신 것을 생각하니 자식으로서 큰 불효를 한 것 같아 원통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제주 4·3행방불명인발굴유해에 대한 장례식이 제주4·3유족회(회장 홍성수) 주관으로 14일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양지공원, 4·3평화공원에서 거행됐다.

이날 장례식은 4·3당시 행방불명됐다가 유해발굴사업으로 발굴된 후 유전자 감식으로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유해 71구 가운데 38구에 대한 발인부터 봉안까지의 장례절차가 이뤄졌다. 25일까지 모든 유해에 대한 장례절차가 마무리된다.

홍성수 4.3유족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고, 장정언 4·3평화재단 이사장이 명예장례위원장 등을 맡는 등 4.3 관련 도내 주요 인사들이 장례식 추진위원을 맡아 60여년 동안 구천을 떠돈 원령들을 위문했다.

   
 
  4·3행방불명자 유해들이 가족들의 품에 안겨 양지공원에 도착, 한줌의 재가 돼 4·3평화공원에 봉안됐다. 김용현 기자  
 
추진위원과 유가족들은 이날 오전 9시 유해들이 유전자 감식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실험식에서 발인제를 지냈다. 유해들은 가족의 품에 안기 채 양지공원으로 향했다.

60여년이 지나 아버지(고 김봉홍, 조천읍 북촌리, 행방불명 당시 41세)의 유해를 찾은 김석보 할아버지(76)는 "아버지는 토벌대와 무장대의 위험을 피해 산속에 숨었다가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경찰의 말을 믿고 자수했다가 1948년 12월 경찰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이 됐다"며 "그 때 내 나이가 13살이었는데 백발이 돼서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유해발굴사업단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매우 기쁘고 아버지가 다시 살아온 느낌이 들었다"며 "하지만 60여년 넘게 차가운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 매장된 아버지를 떠올리면 너무 원통하고, 슬프다"고 흐느꼈다.  

유족들은 60여년 동안 해드리지 못한 효도를 마지막 장례식이나마 해드리기 위해 정성스레 음식을 마련해 제를 지냈다. 노잣돈, 짚신, 옷 등을 준비해 유해와 함께 화장해 편안히 저승으로 가시길 기도했다.

김갑술 할머니(76,)는 60여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고 김시백, 한경면 용수리, 행불 당시 36세)의 장례를 치른다는 애통함에 유골함을 끌어안고 한동안 서글피 울어 주변을 더욱 숙연케 했다.

고 김시백의 며느리인 고영선씨(66)는 "결혼 후 수십년이 지나서야 시아버지를 처음으로 뵙게 됐고, 장례식을 치르면서 며느리의 도리를 하게 돼 다행이다"며 "하지만 시아버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데 60여년이 흘렀다는 사실에 서글프고, 한도 맺힌다"고 말했다.

양지공원에서 하관제를 치른 화장돼 한줌의 재가 된 유해들은 이날 오후 1시께 제주 4·3평화공원 봉안관에서 봉안제를 지낸 후 안치됐다. 오는 26일 봉안식을 끝으로 장례절차가 마무리 된다.

홍성수 4·3유족회장은 "4·3당시 행방불명 희생자들은 60여년이 동안 비통한 나날을 보냈고, 늦게나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며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시국의 탓으로 생각하고 편히 가시길 바란다"고 위문했다.  김용현 기자 noltang@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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