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1> '4·3은 말한다' 연재 ②

 
   
 
  「제민일보」 4·3취재반은 6명으로 재편성됐다. 사진은 1994년 4월 3일 KBS TV가 전국에 알린 '4·3은 말한다' 특집프로 때 방영된 4·3취재반. 왼쪽부터 양조훈·서재철·고홍철·고대경·김종민·강홍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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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 무지몽매"…잘못된 관변 자료

'4·3은 말한다' 연재 ②
1990년 6월 「제민일보」를 창간하면서 4·3연재 제목을 '4·3은 말한다'로 바꾸고 취재반도 재구성했다. 「제주신문」(1988년)에서는 외부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16명이란 매머드급으로 구성했지만, 막상 취재반을 운영해보니 이들을 풀가동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제민일보」 4·3취재반은 6명으로 축소 편성했다. 16명에서 6명으로 줄였기 때문에 단출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특별취재반 6명이란 숫자도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새로 편성된 4·3취재반원은 양조훈(정경부장), 서재철(사진부장), 고홍철(정경부차장), 고대경·김종민·강홍균(기자)이다.

'4·3은 말한다' 기획물은 '해방 전후의 제주상황'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방 직전 일본군 요새로 전락한 제주도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 본토가 미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자 1945년 3월 제주도를 본토 방어의 최후 보루로 삼는 '결(決)7호 작전'을 결정한다. 그래서 만주 관동군 예하부대인 제111·제121사단과 서울 주둔 제96사단 등 총 7만명의 대군을 제주로 집결시키고, 이를 통솔할 제58군사령부를 창설한다. 1945년 8월 일본군이 작성한 제주도의 병력 배치도를 보면, 미군이 상륙했을 때 일본군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준비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전략, 주요부대 배치도 및 병력 숫자 등을 상세히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군 잔무정리부>가 1946년에 작성한 「조선에서의 전쟁 준비」라는 일본군 문건을 입수했기 때문이다. 일어로 된 이 귀중한 자료는 1989년 일본 도쿄에서 발간된 「조선군 개요사」라는 책자에 끼어 있었다. 「조선군 개요사」는 당시 도쿄대 대학원에 유학 중인 강창일 현 국회의원이 알려줘 입수하게 된 것이다.

4·3취재반이 해방 공간 상황에서 더욱 주목한 사실은 '6만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였다. 일제는 1920년대 오사카를 중심으로 군수 산업을 일으키면서 노동력을 제주사람들로 채워나갔다. 제주-오사카 사이에는 '군대환(君代丸)'같은 정기여객선을 띄웠다. 1930년대에 일본 노동시장에 유출된 제주인은 5만명에 이르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터와 홋카이도와 사할린 탄광지대 등에 강제로 끌려갔던 청년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제주사회는 귀환한 청년들로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전 22만명에 이르던 제주도 인구는 줄 이은 귀향 행렬로 28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런 인구 변동률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귀향자들이 고향에서 먼저 한 일은 건국 준비를 위한 자치활동과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는 교육 활동이었다. 당시 뜨거웠던 교육 열기는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제주도에 중등학교 10개소, 국민학교 44개소가 설립됐다는 통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4·3을 언급한 기존의 관변자료에는 제주사람들이 뭣도 모르고 사회주의 사상에 휘말렸다는 의미로 "무지몽매(無知蒙昧)해서…"라는 표현을 곧잘 썼다. 섬 주민들을 무식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부 유족들도 이런 입장에 동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들의 부모가 일자무식한 촌부였음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을 가질 만한 빨갱이'가 아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레드 콤플렉스'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해방공간 상황을 취재하면 할수록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1945년 해방정국에서 전국에서 교육 수준이나 열의가 가장 높았던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비록 일본이란 한정된 무대이지만 국제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던 사람들도 역시 제주 청년들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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