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2> '4·3은 말한다' 연재 ③

   
 
  일제시대 제주-오사카를 오가던 정기여객선 '군대환'. 일제는 오사카 중심으로 군수산업을 일으키면서 노동력을 제주사람들로 채워나갔는데, 해방직후 귀환인구 6만명에 이른 사실은 4·3의 근원적 배경 연구에 중요한 테마이다.  
 

미군정·인민위 등 3·1사건 이전만 54회
주변에선 "4·3사건 언제 다루나" 불만도

'4·3은 말한다' 연재 ③
4·3의 근원적 배경을 살피고자 할 때, 1945년 해방 직후 1년 사이에 일본 등지에서 제주도로 돌아온 귀환인구가 6만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연구테마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제주인들은 일제의 군수산업 육성 전략에 의해 일본 노동시장에 유출되었다.

「제주도세요람」 등에 의하면, 1934년 일본에 체류 중인 제주인은 5만45명으로 집계되었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18만8000여명이었으니, 이와 비교하면 젊은 사람 절반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뜻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저임금과 민족차별이란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더욱 "배워야 한다"는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일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자 동생, 자녀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교육을 시켰다. 인구 비례로 볼 때, 제주도가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많은 고학력자를 배출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미군정은 1947년 2월에 38선 이남의 각 지역 교육수준을 조사한 바 있다. 15개 군지역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대상으로 소학교 이상의 졸업 비율을 조사했는데, 북제주군(지금의 제주시)이 36%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창원(27%), 강릉(26%), 울산(24%), 공주(23%), 충주(23%), 안동(22%), 보성(19%), 영천(17%), 진안(17%), 횡성(12%) 등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농촌사회였던 제주도는 이들 귀환자들로 인해 변화의 새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진보적인 바람이었다. 마을마다 야학과 학교 세우는 일에 앞장선 것도 이들이었다. 또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는 건국 운동에도 매진했다. 그것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활동과 곧이어 출범한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표출됐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이 글은 1945년 전남군정청 정보국장으로 근무했던 그랜트 미드 대위가 자신의 저서(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에 기록한 내용이다. 실제로 제주도는 1945~1946년 시기에 인민위원회의 통제 속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것은 미군 자료를 중심으로 4·3연구 석사논문을 처음 쓴 존 메릴 박사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는 한술 더 떠 "미군정 중대도 인민위원회를 이용했으며, '전심전력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학술적인 연구 결과와 대중적인 느낌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그것은 '인민'이란 용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공고해진 반공이데올로기는 '인민위원회' 하면 먼저 '인민재판'이란 단어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이런 주술에 걸려 있던 나도 인민위원회 대목에선 주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태동에서부터 조직, 활동내용, 특징, 활동했던 인물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이 뿐만 아니라 미군정 실시과정, 신탁논쟁과 좌우 정치 갈등, 제주도제 실시의 정치적 의미, 콜레라와 대흉년, 미곡정책의 실패과정, 모리배 비호사건 등 해방정국에서 일어난 상황을 다루다보니, 예상보다 연재가 길어졌다. 제주 상황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반도 정세, 국제적인 변화 흐름까지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4·3은 말한다'는 1948년 4월 3일 이후의 상황은 고사하고, 그 촉발 원인이 되는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그 이전, 즉 1945년 해방공간에서 1947년 2월말까지의 상황을 연재한 분량만 54회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4·3 연재는 언제 하는 것이냐? 지루하다"는 볼멘소리를 종종 듣게 되었다.

나도 집필하면서 설렁설렁 건너뛸까 하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면 밑에 가려진 배경 부분을 제대로 규명해야 4·3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아니냐?"는 자문과 다짐을 하면서 그 유혹을 떨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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