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3> 되살아난 공안정국 ①

90년 벽두 3당합당 후 정치판세 큰 변화
4월 3일 추모행사 화염병과 최루탄 난무

되살아난 공안정국 ①

   
 
  4·3자료집 「제주민중항쟁」을 발간했다가 옥고를 치른 김명식 시인.  
 

4·3의 전개과정을 조사하면서 절감한 사실은 그 진실규명은 중앙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중앙의 정치지형이 진보적인 판세냐, 아니면 보수적인 흐름을 타느냐에 따라서 4·3 진실규명의 역사도 명암을 달리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바람, 1988년부터 시작된 국회 광주 청문회 등은 4·3 진실찾기를 촉구하는 강력한 촉매가 되었다. 1988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도 이듬해 4월 총선 결과 '여소 야대' 국회로 바뀌자 동력을 잃고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판도를 일순간에 바꿔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단행된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이었다. 새로 탄생된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는 공룡으로 변했다. 국민들이 투표로 정해 준 정치 구도를 인위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이로 인해 4·3 진실찾기도 시련을 맞게 됐다.

첫 시련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터졌다. 4·3 문제로 여의도 KBS가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KBS는 예민한 현대사를 처음 다루는 <역사 탐험-해방과 분단> 3부작을 기획했다. 그 1부작이 '제주, 4·3 전후'였다.

1989년 12월 '제주신문 사태'로 농성중인 신문사에 전형태 PD 등 KBS 취재팀이 찾아왔다. 그들의 취지를 듣고 4·3 관련자료를 제공하고 여러 조언을 해줬다. 그렇게 해서 만든 이 프로가 1990년 2월 8일부터 방송한다고 예고까지 해놓고 제동이 걸린 것이다. KBS 교양국 PD들이 들고 일어났다. KBS노조도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했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1988년 창립된 KBS노조가 첫 농성을 벌인 테마가 바로 제주4·3이 되고 만 것이다.

KBS 최훈근 PD는 「기자협회보」 1990년 3월 3일자에 '금기에의 도전과 다가오는 장벽들'이란 제목아래 그 사태의 전말을 소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역사 탐험 방송 기획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두웠던 시절에 금기시되었던 주제들에 대한 고민은 프로듀서들 사이에 잔잔한 한을 축적시켜왔다. 금기에 대한 도전이 조심스럽게 모색되었고 그때마다 장벽은 어김없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세계와 민족 앞에 다가온 변화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이제 팔짱끼고 앉아 있는 행위는 그 자체로 용서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 같다.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알고 해결해 나가는 작업은 속히 그리고 진지하게 시작되어야만 한다. 역사 탐험 '해방과 분단'은 그렇게 기획되고 착수되었다"

그러나 이 프로는 끝내 불방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BS 취재팀이 방영되지 못한 프로를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보내왔다. 논란이 될 만한 민감한 내용은 애써 피해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불방된 것이다. 금기의 벽이 여전히 높다는 것을 절감했다.

1990년 4월 3일 오후 제주대학교 정문을 사이에 두고 대학생과 경찰이 격돌했다. 제주대 학생 500여명이 이날 학내에서 '4·3 진상규명 및 민자당 분쇄 학도 결의대회'를 가진 후 가두 진출을 시도하다 이를 막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으로 맞섰다. 1시간 30분 동안 벌어진 격렬한 충돌로 대학생과 경찰 10여명이 부상을 당하고, 대학생 일부가 연행됐다.  

사월제 공준위 측은 1989년에 이어 제주시민회관을 임대해 4·3 추모제 행사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관이 불허됐다. 시민회관은 다음해인 1991년에도 보수공사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보이지 않은 손'의 작용인지 해마다 4월만 되면 시민회관 공사가 벌어졌다.

사월제 공준위는 할 수 없이 1990년 4월 1일 제주교육대학교에서 4·3 추모행사를 추진했다. 제주4·3연구소도 이날 제주가톨릭회관을 빌려 첫 4·3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세미나에서 고창훈(제주대 교수)·안종철(전남대 강사) 등이 발제했다.

한편 서울에서도 경찰의 감시 속에 4월 1일 제사협 주최의 4·3 추모제가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렸다. 3일에는 제사협·민족문학작가 공동 주최의 '4·3 민족문학제'가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펼쳐졌다.

1990년 7월에는 4·3자료집 「제주민중항쟁」(전 3권)을 발간했던 김명식 시인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이적표현물 제작)로 전격 구속됐다. 그때 그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제주민중항쟁」은 1988년 3월에 출판되었지만 공안정국이 되살아나면서 뒤늦게 문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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