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4> 되살아난 공안정국 ②

   
 
  1991년 4월 3일 최루탄이 난무하는 속에 4·3추모제 행사 참석을 막는 경찰대. 이틀에 거쳐 경찰에 연행된 시민과 대학생이 400명에 육박했다.  
 

 경찰, 반공색채의 유족회 위령제만 허용
'4·3 공산폭동론' 실체규명 필요성 절감

되살아난 공안정국 ②
공안정국은 1991년에 들어서면서 더 강화되는 듯했다. 4·3 추모행사를 둘러싸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속에 시민·대학생 400명 가까이가 연행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해 4월 3일 4·3 의례는 유족회가 주최하는 제주시 신산공원 '위령제'와 사월제 공준위가 여는 관덕정 광장 '추모제'로 양분되었다. 추모행사는 1989년부터 사월제 공준위에서 개최해 왔는데, 유족회가 1991년부터 자신들의 주도 아래 위령제를 봉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공안당국은 유족회의 위령제는 허용하고, 사월제 공준위의 추모제는 원천 봉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첫 충돌은 제주대학교 정문에서 발생했다. 대학생 1000여명이 학내 집회를 마치고 관덕정 광장 추모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교문을 나서는 순간 경찰이 원천 봉쇄한 것이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오갔다. 경찰은 적극적으로 시위 학생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충돌은 추모제 행사장인 관덕정 광장에서 벌어졌다. 경찰이 강제로 집회를 해산하면서 시민들과 부닥친 것이다. 경찰은 항의하는 시민들을 연행했는데 이날 하루 경찰에 연행된 시민과 대학생이 222명이었다.

밤에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제주시내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다음날인 4일 오후에는 제주대 학생 1000여명이 관덕정 앞에 자리잡았던 제주경찰서 정문에서 과잉 진압에 항의하는 연좌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 학생을 해산시키고 다시 160여명을 연행했다. 이같은 경찰의 강경 대응으로 연행자 수는 400명에 육박했다.

한편 유족회가 주최한 위령제는 국회의원, 지역 유지 등이 참석한 가운데 3일 오전 11시부터 신산공원에서 열렸다. 유족회는 1988년 10월 반공유족회로 출발했다가 1990년 6월에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로 개칭되었다. 이는 토벌대에 희생당한 유족들도 아우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명칭을 바꿨음에도 조직을 주도한 사람들은 군경 유가족으로, 반공유족회를 대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입장은 이날 유족회장의 추도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경찰관 출신인 유족회장은 "남로당 지령을 받은 붉은 광란배들이 제주도를 공산기지로 만들려고 피비린내 나는 공산폭동을 일으켰다"면서 "엄연한 공산폭동을 민중봉기라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보다 못해 분연히 힘을 모았다"고 역설했다.

그러자 행사장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한 유족이 "모든 희생자 영혼을 위로한다기에 왔는데 4·3을 공산폭동으로 왜곡 규정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면서 자신의 할아버지 위패 종이를 뜯어내 불태우려다 주최 측과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위패를 불사르려던 당사자로 보도된 '오모씨(23·남원)'를 추적해 봤더니 현재 제주도의회 운영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오영훈 도의원이다. 그는 그 소동이 있었던 2년 후인 1993년에 제주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어 제주지역 총학생회협의회(제총협) 의장으로 뽑힌 그는 제총협 이름으로 4·3특별법 제정과 특위 구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필자는 얼마 전에 오영훈 위원장을 만났는데, 그는 "위령제 소동이 4·3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1991년 4월 3일을 전후해 전국 25개 대학교에서 '4·3항쟁 계승 및 4월 구국투쟁 선포 결의대회'가 열려 경찰과 충돌했다. 또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서울 지역 9개 대학에 다니는 제주출신 학생들이 '재경 제주학생 소모임 협의회'를 조직해 고려대에서 4·3 추모제를 개최했다. 대학가에서는 4·3에 대한 미국 책임문제를 부각하며 반미 이슈로 삼았다.

기획물 연재를 책임진 나는, 공안 바람이 거세게 부는 상황에서 우리를 옥죄는 '4·3 공산폭동론'의 실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4·3의 진정한 명예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회에 연재됐던 4·3프로 불방과 관련, 불방에 대한 KBS 내부의 반발과 진통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90년 4월 촉발된 'KBS 사태'와는 직접적 관련성이 희박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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