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6> '공산폭동론' 추적기 ②

박갑동 "정보기관이 고쳐서 쓴 글" 고백
백선엽 장군 "4·3은 黨 말단 자의적 행동"

'공산폭동론' 추적기 ②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왼쪽)과 「실록 지리산」 저자 백선엽 장군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의 "중앙당 폭동지령이 있었다"는 글은 1973년 「중앙일보」의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처음 다뤄졌다. 1983년에는 「박헌영」이란 책자로 출간됐다.

박갑동이 쓴 책을 보면서 4·3취재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자에는 단 2쪽에 4·3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짧은 글에서 일곱 군데나 왜곡된 부분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중앙당의 폭동지령'뿐만 아니라, '4월 3일 감찰청과 제주경찰서의 기습점령',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 푸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의 현지 파견', '조노구(趙魯九) 등장' 등 기존의 잘못된 자료들을 짜깁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그가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낸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갔다.

거처를 수소문했더니 그는 일본 도쿄에 살고 있었다. 주소를 알아낸 4·3취재반은 그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그의 저술 내용과 우리 취재반의 조사 내용이 다른 비교 분석표를 보내고, 답신을 요구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4·3취재반은 김종민 기자를 일본에 파견했다. 박갑동은 직접 만나주지는 않았다. 대신 전화 인터뷰를 통해 "중앙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신문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는 충격적인 답변을 했다. 그는 "그 당시 남로당의 노선은 전면적인 비합법 무력투쟁 단계가 아니"라면서 제주도당의 돌출성을 상기시키고, "「박헌영」이란 책은 정말 부끄러운 글"이라고 인정했다.

이 충격적인 인터뷰 내용은 「제민일보」 1990년 6월 28일자에 보도됐다. 이에 당황한 것은 그동안 박갑동의 글을 재생산하면서 공산폭동론을 펴오던 보수 진영의 학자들이다. 한 보수 논객은 박갑동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내용을 재확인한 뒤 "왜 그런 인터뷰에 응했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필자가 박갑동을 직접 만났을 때 그로부터 들은 것이다.

 육사졸업생」을 쓴 장창국 장군의 회고록이나 박갑동의 사례에서 보듯, 현대사 관련 신문 회고물에서도 왜곡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신문에 연재할 때 회고 당사자의 구술과 기존의 자료들을 짜깁기해 기자들이 재작성하기 때문이다. 민감한 부분은 정보기관에서 개입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4·3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백선엽 장군(육군 대장 예편)이 「한국일보」에 '실록 지리산' 연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연재의 핵심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나, 그 배경이 되는 4·3을 다룰 것은 불 보듯 훤했다. 특히, 백선엽 장군은 1948년 4월 3일 국방경비대 제3여단 참모장(중령)으로 예하부대인 제9연대를 방문한 뒤 제주읍내에 머물다 사태를 만났다. 곧이어 통위부(육군본부의 전신) 정보국장을 맡아 4·3 사태를 진압한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4·3 성격 규명에 매우 중요했다.

나는 예방 차원에서 1990년 12월 백 장군에게 서신과 함께 우리의 조사 자료를 보냈다. 신문 연재물과 김익렬 유고, 존 메릴과 박갑동 인터뷰 기사 등이었다. 이런 노력이 주효했던지 백 장군은 「실록 지리산」(1992년에 책자로 발간됨)에 4·3에 관해 37쪽이나 기술하면서 양쪽 주장을 용해해내는 등 신중한 표현을 사용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을 언급하면서 "군정 당국이나 경찰이 사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민심이 이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거나, 4·3 초기 경비대가 미온적 대응을 한 것은 "이 사건을 경찰·서청에 대한 주민들의 감정 폭발 정도로 치부하고 싶었던 속마음이 반영된 결과였는지 모른다"고 표현한 것 등이 그 예다.

특히 그는 민감한 사항의 하나인 남로당 중앙 지령설을 부인했다. 김점곤 장군의 말을 인용,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정리했다. 백 장군은 말미에 다음과 같은 의견도 피력했다.

"나는 최근 제주도내에서 일고 있는 '4·3 조명'과 '4·3 치유'의 노력을 우려와 기대 속에서 보고 있다. 우려는 어느 쪽이고 상대방의 과오만을 과장하는 노력들이 가져올 결과적인 또 한번의 대립에 대한 것이다. 반면 기대는 활발한 증거 수집과 폭넓은 상황 조명을 통해 당시의 사태 전개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상처를 서로 싸매고 화합할 수 있는 분위기 성숙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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