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7> '공산폭동론' 추적기 ③

   
 
  「제민일보」의 1991년 4월 3일자 1면 톱기사 '국사 교과서의 4·3 곡필' 사례가 보도된 신문 자료.  
 

국사 필자들 "4·3 연구 못해봤다" 실토
대서특필하자 국편 위원장 내려와 토론

'공산폭동론' 추적기 ③
'공산폭동론'의 허상이 하나씩 드러나자 더욱 궁금해진 것이 교과서 기술내용의 진위여부였다. 1980년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제주4·3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었다.

"제주도 폭동사건은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도에서 공산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

이 교과서는 1990년 일부 수정되었다. 그러나 공산폭동론에는 변함이 없었다.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대한민국 기성세대 상당수는 이런 교과서로 교육을 받았다. '4·3' 하면 '공산폭동'으로 각인되었고, 무고한 죽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진압작전은 정당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2000년부터 4·3중앙위원회에 근무하면서 이런 교육을 받은 중앙부처 관료들을 만나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과연 무슨 근거로 이런 글을 썼을까? 김종민 기자에게 교과서 필진들을 상대로 그 경위를 취재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것이었다.

'북한공산당 사주' 관련 글을 썼던 서울 모 대학 이현희 교수는 "내가 글을 쓸 때에는 새로운 자료가 없어서 예전 자료를 인용하는 수밖에 없었다"면서 "의식이 잘못된 원인이 뭐냐면, 그때는 모두들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에…"라고 말끝을 흐렸다.

수정 교과서를 집필한 국편 신재홍 편사부장은 "내 전공은 일제시대사이고, 어쩌다보니 현대사 부분까지 담당하게 된 것인데 그쪽에 대해선 공부를 많이 못해서 다른 분들의 글을 참조하는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학자들이 현대사 관련 글쓰기를 기피하는 바람에 집필자를 구하지 못해 국편 관계자가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취재 결과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예민한 사항을 그렇게 허술하게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중차대한 2세 교육을 담당하는 문교 당국의 안이한 역사인식이 개탄스러웠다.

「제민일보」는 1991년 4월 3일자 1면 톱기사로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제목 자체도 "국사 교과서 속의 4·3 왜곡 편파 오류투성이 / '북한공산당의 교란작전' 곡필 / 필자들 본지의 해명요청에 '4·3연구 못해봤다' 실토"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3면에는 교과서 집필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다음날에는 사설을 통해 국사편찬위원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보도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편 위원장 박영석 박사 일행이 제주에 내려왔다. 4·3취재반과의 토론은 박 위원장 숙소인 호텔 객실에서 장장 4시간 동안 벌어졌다. 토론이라기보다는 '격론'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나는 "국편이란 책임있는 기관에서 발행한 교과서 내용에 오류 왜곡이 말이 되느냐? '북한공산당의 사주'란 표현을 썼으면 최소한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증거를 대라"고 몰아붙였다. 국편 관계자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로 변명했지만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가 들이대는 조사 자료에 반박하지 못한 채 쩔쩔매는 형국이 되었다. 일제사 전공인 박영석 위원장은 "나도 항일운동사를 조사하기 위해 만주 등을 누벼 다녔지만, 4·3취재반이 이렇게 '필드'(현장조사라는 뜻)에 강한 줄 몰랐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교과서 개정작업은 그 후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4년에는 서중석 교수(성균관대)가 '제주4·3항쟁'이란 용어의 교과서 개편 시안을 내놓았다가 보수언론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는 일도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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