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8> 존 메릴과의 만남

   
 
  1992년 6월 미 문화원이 설치한 위성중계 장비로 미국 워싱턴에 있는 존 메릴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필자와 대담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 김종민 기자. 오른쪽 사진이 존 메릴 박사.  
 

"미군정이 4·3 원인 제공했던 것은 사실" 
세차례 인터뷰…美문화원이 주선하기도

존 메릴과의 만남
"제2차 대전 이후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대중적 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의미심장한 글은 1975년 미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에 쓰여 있다. 존 메릴은 1968년부터 1년여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바 있다. 미국으로 되돌아가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4·3 관련 미군자료를 찾아내 이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이 우리나라 대학가에 유포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이 글은 금기시되던 4·3을 연구한 첫 논문이라는 점, 미군정 자료가 상당히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존 메릴은 그 후에 한국전쟁의 배경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7년부터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대외문제 분석관으로 근무했다.

필자는 존 메릴 박사와 세 차례 인터뷰했다. 첫 만남은 1988년 11월 제주대학교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미국 학자가 보는 4·3'이란 주제의 강연회 직후였다. 인터뷰는 대학교에서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뤄졌다(「제주신문」 1988년 11월 18일자 보도).

두 번째는 그가 1990년 6월 제주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주최로 열린 '한국전쟁의 기원' 세미나 참석차 제주에 왔을 때였다. 이때에는 2시간가량 면담하면서 4·3에 관한 질의·응답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제민일보」 1990년 6월 15일자 보도).

세 번째는 매우 이례적인 만남이었다. 주한 미문화원에서 존 메릴 박사와 위성중계 토론 대담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해온 것이다. 나는 제주도에서, 존 메릴은 위싱턴에서, 통역을 맡은 통 킴(Tong Kim)은 버지니아에 있으면서 1시간 40분 동안 삼각 전화 위성인터뷰를 한 것이다. 국무부 통역관 통 킴은 역대 한미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김정일-올브라이트 국무장관 회담 통역을 맡았던 한국계 미국인이었다(「제민일보」 1992년 6월 2일자 보도).

이 세 차례 인터뷰를 통해 존 메릴 박사가 언급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논문 제목 중 'Rebellion(반란)'의 의미는 사건의 본질과는 상관없고, 규모가 크고 장기간에 걸쳐 일어났다는 뜻이다.

둘째, 4·3의 원인은 복잡하지만, 제주도민 상당수가 5·10선거에 반대했고 1947년 3·1사건 이후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대한 깊은 반감이 큰 요인이다.

셋째,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지만 제주도당의 개입은 있었다. 4·3의 성격을 이해하는데는 시간대의 분석이 중요하다.

넷째, 미군정의 실정이 4·3 발발 원인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우익테러의 기회를 허용했던 것도 미군정의 불찰이다.

다섯째, 그러나 유혈사태의 책임은 이승만 정권이 져야 한다. 따라서 미군정만이 아니라 한국정부, 유격대의 역할 등에 관해서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존 메릴 박사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미군정이 4·3 발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인정하지만, 대량 학살의 유혈사태는 이승만 정부가 책임질 문제라고 선을 긋는 논리였다. 필자는 1948년 8월 24일 이승만-하지가 체결한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었던 점, 초토화작전의 발상도 미군 고위층에서 나온 점 등을 들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4·3 논의가 봇물 터지듯 나오자 한국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쪽에서도 당황했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가에서 광주 문제에 이어 제주4·3을 반미 이슈로 삼으려하자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고심했다고 한다. 그 무렵 '4·3 전문학자'인 존 메릴 박사의 잦은 한국 방문, 미문화원의 인터뷰 주선, 미국정부가 가장 신뢰하는 통역관 동원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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