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31> 4·3발발 원인 취재 ①

4·3연구소, 실종되었던 역사자료 찾아내
복시환사건 등 격동의 역사 생생히 추적

4·3발발 원인 취재 ①

   
 
  1947~48년 치의 「제주신보」 기사철 발굴 사실을 보도한 「제민일보」 1991년 1월 1일자 기사. 제주4·3연구소가 발굴한 「제주신보」는 4·3발발 원인 규명에 큰 도움이 되었다.  
 

4·3취재를 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뒤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던 일들이 묘하게 술술 풀리는 경우를 여러번 체험했다. 그 타이밍도 절묘했다. 실종됐던 「제주신보」 신문철 발굴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90년 12월 제주4·3연구소는 4·3발발 시기의 제주도에 하나밖에 없던 「제주신보」 신문철을 찾아내 영인본 작업에 착수했다. 새롭게 발굴된 「제주신보」는 1947년 1월부터 1948년 4월까지의 신문이었다. 이 시기는 1947년 3·1 발포사건을 시발로 1948년 4·3봉기로 이어지는 제주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였다. 가장 궁금했던 시기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신문철을 발굴한 것이다. 4·3연구소는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부터 신문 복사본을 입수하였는데, 그 출처는 국회도서관으로 알려졌다.

4·3취재반이 「제주신보」를 찾으려고 제주도내 도서관과 언론기관을 뒤졌지만 1951년판부터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신문을 찾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발굴된 시기도 절묘했다. 「4·3은 말한다」 연재가 해방정국부터 1946년까지의 연재를 마치고, 곧 1947년에 일어난 일들을 취재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제민일보」는 1991년 1월 1일 신년호에 '40년 실종 역사자료 「濟州新報」 철 찾았다'는 제목아래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새로 발굴된 「제주신보」 기사를 통해 경찰의 대형비리사건인 '복시환(福市丸) 사건'의 진상, 3·1 발포와 3·10 총파업의 전개 과정, 군정당국의 대응, 잇따른 고문치사사건 등 '격동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신문 기사를 보면서 기존의 현대사 관련 저술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기술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령, 기존자료에는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주관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일이 '1946년 2월'이라고 기재돼 있었는데, 「제주신보」 기사를 통해 '1947년 2월 23일'임이 밝혀졌다. 민전 결성식에서 당시 박경훈 도지사가 축사를 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기존 관변자료에는 "1946년 5월 정판사사건 이후 좌익정당이 지하로 스며들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 신문 1947년 1월 1일자 신년호에 하지 중장 못지않게 남로당 위원장(허헌), 민전 대표(김원봉)의 신년사도 비중 있게 다뤄진 모습을 보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함을 느꼈다.

「제주신보」가 1947년 1월 특종 보도한 '복시환 사건'은 모리배 의혹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해방은 모리·오리배 해방인가?'라는 결기 있는 제목도 눈길을 끌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경찰 책임자인 신우균 제주감찰청장이 파면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군정의 실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일제 통치기구의 관리들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특히 경찰 쪽이 심했다. 미군정경찰 경위급 이상의 간부 82%(1157명 중 949명)가 친일경찰 출신이란 통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어제의 '일제순사'가 오늘에는 미군정 경찰복을 입고 활보하는 모습을 보며 민중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일제 경찰 출신들은 '친일파'라고 공격을 받을 때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상대를 좌익 사상범으로 몰고 가면서 '새로운 애국자'인양 변신을 시도했다.

궁지에 몰린 일제 경찰 출신 신 제주감찰청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복시환 사건이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제주출신 소장파 경찰관들이 그의 퇴진을 요구하였고, 신 청장은 사면초가였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중앙무대에서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제주경찰'이라고 역공을 폈다. 1947년 2월 23일 난데없는 응원경찰대 100명의 제주 급파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응원경찰대가 3월 1일 발포사건을 일으키면서 제주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긴장상황으로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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