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32> 4·3발발 원인 취재 ②

 목격자 찾아내 관덕정 앞 발포 현장 재현
"잘못된 발포"…경찰, 상황 모면에 급급해

4·3발발 원인 취재 ②

   
 
  제주도 초대 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오른쪽)과 초대 도지사 박경훈. 두 사람은 3·1사건 직후 교체됐다.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어 부상을 입힌 사건을 좌익진영에서 역이용, 기마경찰대가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흑색 선전해 멋모르는 1만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해서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

이 글은 1982년 판 「제주도지」와 1990년 판 「제주경찰사」 등 공적 기록물에 기술된 '1947년 3·1 발포사건의 진상'이다. 과연 그랬을까. 4·3취재반은 이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당시 미군정 정보보고서, 중앙지와 지방지를 포함한 신문기사, 관변자료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또 사건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들을 찾아 나섰다.

행운이랄까, 발포 현장인 관덕정 앞 광장과 교통대 주변에 있었던 목격자 5명을 수소문 끝에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날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있었던 3·1절 기념집회를 마친 일부 시위 군중들이 오후 2시 넘어서 관덕정 앞 광장을 S자 형태로 위세를 부리면서 지나간 다음에 '돌발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 사건은 교통대 앞 커브 길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6세 가량의 어린이가 차였는데도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이에 당황한 기마경관이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아가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는 것이다.

그 발포 순간 관덕정 광장에는 100~200명 가량의 관람 군중만 있었음도 확인됐다. 앞에 언급된 공적 기록물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이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또 도립병원 앞에 있던 경찰이 발포하여 행인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이 두 건의 발포는 모두 일주일 전에 제주에 도착한 응원경찰대가 저지른 것이다.

다각적인 취재를 통해 이날 사망한 6명의 신원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허두용),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여인(박재옥), 40대 후반의 농부(송덕수, 양무봉) 등 누가 보더라도 시위군중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등 뒤에 총탄을 맞은 것이다. 현장에 있었던 증언자들은 "공포만 쏘아도 군중들이 흩어질 상황이었는데, 도망가는 군중들을 향해 정조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과잉반응을 보인 응원경찰대의 심리상태가 문제였다. 이 문제는 미군 쪽에서도 인식했음이 드러났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6년 가을(대구 10·1사건) 좌익 폭도들에 의해 동료 경찰이 잔혹하게 당했던 사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심리가 불안한 이런 경찰관들을 제주에 파견했던 것이다.

분명히 부적절한 발포인데도, 경찰 당국은 '대규모의 시위대가 경찰관서를 습격하려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은 격으로 제주사회가 격분했다. 당시 「제주신보」는 경찰 성명이 잘못됐음을 조목조목 따지고 나섰다.

이에 난처해진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은 "나중에 알아본 결과 군중들은 대로 만든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을 뿐 곤봉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꼬리를 내렸다. 박경훈 도지사도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이런 사실은 어렵게 찾아낸 「독립신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발포 현장 상황이 이런데도 당시 경찰은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상황을 모면하려는데만 급급했다. 육지부로부터 다시 응원경찰을 끌어들여 되받아치기에 나선 것이다. 통행금지령을 발동하고, 3·1절 행사 관계자들을 연행했다. 곧이어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제주사회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깔린 것이다.

결국 1947년 3·1 발포사건은 제주 현대사의 비극을 증폭시킨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발생 경위도 그렇지만, 그 후 진행된 미군정의 대응방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4·3'이란 불행한 사태도 여기서 잉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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